#12 스타트업을 하는데 고추를 심으러 가요?
진짜 자연농법 장인을 찾아 신뢰를 얻기까지
스타트업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강남 또는 판교의 구글스러운 오피스에서 서로를 영어이름으로 부르며 일하거나 무슨 대형 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스티브잡스 같은 피칭을 하는 모습이 대부분 떠오를 것이다. 물론 그런 스타트업들도 많다. 하지만 경북 시골 구석에서, 디지털 격차로 인해 이커머스에 진입하지 못한 중장년 농민과 소상공인을 만나겠다고 결심한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아이템을 정하고 우리가 가정한 농민, ‘좋은 농산물을 가지고 있으나 온라인에서 물건을 어떻게 파는지 몰라 친환경 유기농 자연농법으로 생고생해서 짓고도 헐값에 도매상에게 넘기는’ 그 농민을 찾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유기농 무농약 인증을 받은 농민의 리스트는 생각보다 쉽게 검색할 수 있었지만(웹사이트에 이름과 전화번호가 모두 나와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찾는 농민이 단순히 인증만 받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런 종류의 인증은 특정 시기에 특정 영역의 작물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것이기에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오죽하면 시골에서도 ‘약 안 친다는 말은 우리 엄니 얘기래도 못 믿는다’라고들 하시던가.
우리가 찾는 것은 행정기관의 인증을 받아 대형 마트에 유기농으로 납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념과 뚝심과 오기를 가지고 제초제와 화학비료 없이, 진짜 제대로 된 농사를 짓는 ‘농사 장인’이었다. 오히려 이런 분들은 인증을 안 받는 경우도 많았는데, 행정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소규모로 짓고 알음알음으로 나가기 때문에 굳이 인증을 받을 필요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에 수소문을 하고,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소개를 부탁드리고, 마르쉐@ 같은 파머스 마켓에서 정평이 난 장인들을 찾아다녔다. 역시 발품은 성과로 돌아온다. "아, 저쪽 마을에 약 안 치고 삼만 평 짓는 양반 하나 있어."
하지만 이 보이스피싱의 시대에 서울 말씨를 쓰는(그렇다. 우리는 경북에 산지 1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서울말을 쓴다. 어설프게 현지 말씨를 따라했다간 경을 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대부분은 경계부터 했다. 몇 번을 찾아가서 취지를 설명하고 돈을 내라는 것이 아니며 일단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고 샘플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역시 지역 텃세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조금, 아니 많이 좌절했다.
그런데 코로나는 우리에게도 뜻밖의 기회를 제공했다. 날이 따뜻해지고 꽃이 피던 어느 날 예전에 만나 뵈었던 ‘장인’ 께서 친히 전화를 걸어주셨다. 당장 내일 고추를 심어야 하는데, 일손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는 외국인 인력을 써 왔는데, 코로나로 인해 이분들이 귀국했거나 입국을 못하거나 아니면 그냥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서 돈주고도 못 구하는 상태가 되어서 다 키워놓은 고추 모종이 말라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올 수 있겠냐고 하기에 그러겠다고 말씀드렸다. 장인께서는 기쁜 목소리로 답하셨다. “그럼, 내일 해 뜰 때 보자고!”
…잠깐, 해 뜰 때라니, 요즘 일출시간 5시 반 아닌가?
아니었다. 일출은 5시 반이지만 5시면 벌써 동이 터서 훤했다. 그래서 우리는 4시에 일어나 출발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산란계 3천 마리를 10년간 길러온 전력이 있었다. 물론 농사도 지었다. 텃밭이긴 하지만 시골에선 텃밭도 천 평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입어온 ‘일복(a.k.a. 몸빼바지)’과 장화, 목을 덮는 꽃무늬 모자, 그리고 쭈그리고 앉아 작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엉덩이 부착식 방석을 완비하고 약속 시간 장인의 광활한 밭에 도착했다. 장인께서는 해도 뜨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장승처럼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솔직히 장인께서는 우리에게 별 기대를 안 하셨다고 한다. 너무 일손이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했을 뿐이고, 서울스러운 얼굴에 서울스러운 옷차림, 서울스러운 말씨를 쓰는 처자들이 해봤자 얼마나 하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새벽 농사일에 최적화된 우리의 옷차림을 보고 조금 놀랐고, 그다음에 고추 모종을 심는 손놀림을 보고 꽤 놀라셨으며, 아침 참을 먹을 땐 우리가 사양도 않고 너무 많이 먹어 다시 놀랐고(정말 맛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일을 마치자 입점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셨다고 한다.
심지어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땐 일당을 주시려고 해서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빈 손으로 보낼 수 없다며 창고에 있는 사과며 장아찌, 고추 모종 세 판까지 주시는 바람에 그것까지는 거부할 수가 없어서 차에 그득그득 싣고 돌아왔다.
그렇게 이후에도 두 번 정도, 감자 캘 때와 배추 심을 때 두 번 정도 차출되었는데 나름대로 꽤 즐거운 일이었다. 땀흘리는 육체노동은 다른 일이 줄 수 없는 충족감이 있다. 똑같이 힘쓰는 일이지만 헬스장에서의 운동과 달리 수확물이 내 등뒤로 그득그득 쌓이는 것은 꽤 보람있었다. 하지만 이커머스 스타트업을 하는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장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두어 번 가서 일을 하니 처음에는 말을 아끼던 장인들도 툭툭,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우리는 제초제는 절대 안 쓰고 벌레 잡는 약만 쓴다. 그것까지 안 쓰면 이 밭은 완전히 전멸이다. 그래도 독성이 거의 없어서 우리 자식들한테도 먹일 수 있는 거다. 사실 이 품종은 내가 아는 사람에게 힘들게 종자부터 구해서 키운 건데 얘가 병충해에 강하고 매운맛도 시원하고 좋다. 이거 준 사람이 남들한테 품종 이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같이 손에 흙을 묻히며 일해본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피곤에 절어 풀풀 풍기는 서로의 땀냄새를 맡으며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차 안에서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창업했으면 이런 건 못했을 것 같죠?”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고추를 수확할 때에는 다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입국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