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슈퍼컵 요트대회를 참관하고 돌아온 후, 우리는 대회에 한번 나가보자는 결의를 하고 다음 대회를 물색했다. 가장 가까운 일정으로 전북 부안에서 열리는 ‘새만금컵 국제요트대회’가 있었다.
요트대회에 출전하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모든 요트대회에는 Notice of Race(NOR)라는 공식 문서가 있다. NOR에는 대회 일정부터 참가 가능한 배의 규격, 상금, 적용되는 규칙과 경기수역 및 코스 등 해당 경기에서 알아야 할 모든 규칙과 코스에 아예 신청서 양식까지 그 안에 들어있다. 문서를 반으로 갈라 왼쪽은 한국어, 오른쪽은 영어로 써 있어서 처음 봤을 땐 이게 무슨 암호문인가 싶었는데 몇 번 보다보니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4년에 한 번씩 개정되는 국제요트협회 룰북도 이런 식으로 영문과 국문이 병기되어 있다. 그리고 해석에 문제가 생기면 영문을 우선으로 한다.
이것은... 추억의 영한대역 디자인...
자 이제 NOR도 확인했고, 경기에 출전하려면 그에 맞추어 출전신청서를 써야 했다. 배 이름과 팀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여기서부터 난항이었다. 사실 우리는 요트 팀명과 배 이름을 미리 정해두었다. 그런데 부산 슈퍼컵에 가보니, 우리가 정한 이름을 쓰고 있는 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철자를 바꾸거나 할 수도 있었지만 손바닥만한 요트판에서 데뷔전부터 카피캣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오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팀 이름 따로, 배 이름 따로 이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요트 대회에 가서 보니 다들 배 이름=팀 이름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대화를 할 때도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배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캐리비안 팀 이번에 잘 하던데요?", "크라켄 팀 스키퍼세요?" 이런 식이었다(한 팀에 배가 여러 대라면? 끝에 숫자를 붙여서 랍스터1, 랍스터2 이렇게 불렀다).
안 그래도 사람들은 우리를 내일학교라고 불렀다가 후아라고 불렀다가 핑크대가리, 블루대가리(머리색깔이 이상하다는 뜻이다...)라고 부르는 식으로 다들 제멋대로였는데, 우리의 명칭에 대해 확실하게 정하려면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았다. 약간의 논의를 거쳐, 그냥 Hooaah를 배 이름이자 팀 이름으로 하자고 결정했다. 보통 회사들은 만만찮은 광고비를 내야경기용 요트 위에 로고를 붙일 수 있는데, 우리는 아예 크루 전원이 스타트업 후아의 구성원이니 회사 이름을 안 내세우는 것도 바보같은 짓이었다.
선수로서 대회에 참여하기 전 미리 부산 슈퍼컵을 답사해본 것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특히 배에 붙일 스티커의 크기를 결정할 때 그 사실을 절감했다. 배들은 대부분 선체가 하얗고 세일은 까만색이라 멀리서 보면 하나도 구분이 안 된다. 그리고 배의 흘수선 아랫부분은 물에 잠기기 때문에 그 아래로 스티커가 들어가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배에 붙일 스티커를 가능한한 크게 만들었다(배용 스티커가 따로 있나 싶었는데 차량용으로 하면 된다고 했다). 가능한한 위쪽으로, 붙이다보니 수평을 못 맞춰서 오른쪽 위가 올라가버렸지만 오히려 그게 더 신선했다. 그 결과 우리 배는 어딜 가나 눈에 확 띄었다.
여러분, 절 믿으셔야 합니다. 로고는 크게! 무조건 크게 하세요
팀복도 맞춰야 했다. 부산에 가서 보니 유니폼을 맞춰입은 팀이 왠지 더 실력있어 보였다. 전세계적으로 공히 팀 로고가 박힌, 칼라 있는 셔츠가 시상대에 올라가는 요트인의 정복인 것 같았다. 티셔츠 업체에후아로고를 대문짝만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프레스 기계가 작다고 안 된다기에 티셔츠용 전사 스티커를 따로 주문해 기능성 티셔츠에 다리미로 다려서 붙였다.
페이퍼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요트 대회에 출전하려면 배 자체의 ORC 인증서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요트대회는 다양한 기종이 참가하는 레이팅 경기라서, 배의 무게와 세일의 크기, 실제 속도를 두루 고려한 공식에 따른 레이팅(핸디캡)을 받아야 출전이 가능했다. 보험도 필수적이었다. 경기 출전을 위해 요구하기도 하지만, 경기중 혹시 있을지도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ORC인증서와 보험증서 둘 다 1년간 유효한 것이라서 한 번 받아놓으면 다른 대회 때도 쓸 수 있었다. 배 뿐만 아니라 사람도 자격이 필요했다. 출전할 선수들은 대한요트협회에 동호인 선수로 등록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매년 갱신해야 한다. 우리는 감독님과 부산슈퍼컵에 먼저 출전했던 팀에게 두루 물어보고 행정처리를 완료했다.
ORC 인증서: 솔직히 여기 나온 숫자들의 뜻을 아직까지도 다는 모릅니다...
다음은 출전선수 등록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파이스트를 가지고 제대로 경기를 뛰려면 다섯 명이 필요했는데, 우리는주 멤버가 4명이었다. ‘피트맨’이 필요했다. 피트맨은 제네이커를 올리고 내릴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아웃헐과 붐뱅 등 '시스템'이라는 세일링의 아주 디테일한 부분을 콘트롤해야 했다. 대부분 경기에서 승패가 갈리는 지점이 출발을 얼마나 잘 했느냐, 그리고 마크 라운딩 지점에서 제네이커를 얼마나 빨리, 실수 없이 제대로 펴고 접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피트맨의 실력이 승패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무엇보다 마크를 돌거나 자이빙을 할 때 스키퍼와 집 트리머, 바우맨과 피트맨은 정말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 호흡을 단시간에맞추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새로운 사람을 훈련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동호인들처럼 선수를 영입하고 싶지도 않아서 고민하던 우리는 먼저 부산 슈퍼컵에 출전했던 팀의 막내, 수열이에게 함께 새만금 대회에 나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 팀은 부산 슈퍼컵 때 먼 객지까지 배를 가지고 가는 일정이 너무 고되었던 나머지 새만금 대회에는 나가지 않기로 결정한 참이었다. 울진에서 직장을 다니는 수열이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요트를 시작한 데다가 딩기도 함께 배웠고,후아 팀과 연령대도 비슷한데 요트에 진심이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여러 가지로 호흡이 잘 맞았다.
그렇게 우리는 다섯 명의 엔트리를 구성해서 새만금 국제요트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훈련을 시작했다.
일단 배를 타는 것 자체는 그간 충분히 훈련을 해서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요트 경기가 룰을 가진 스포츠이고, 우리는 그 룰부터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요트 경기의 룰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어렵다! 요트의 역사가 무슨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 1세까지 올라가는만큼 규칙의 역사도 굉장했다. 어떤 스포츠건 당연히 규칙이 있어야겠지만, 요트 경기에서 규칙이 필요한 이유는 좀 더 복잡하다.
바다 위에서 두 배가 마주치면 누가 우선권을 가질까? 아주 복잡한 룰에 의해 정해진다. 우리 배와 상대 배의 세일이 선체의 오른쪽에 있는지 왼쪽에 있는지, 내 배의 선수(뱃머리)가 상대 배의 선미를 따라잡았는지 아닌지, 마크 주변의 해역에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 등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우선권을 가진 배(권리정)는 그대로 가도 되지만 아닌 배는 비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경기에서 가끔은 거의 깻잎 한장 차이로 스쳐 지나갈 때까지 버티는 경우도 있고, 배가 부딪힐 지경이 되어서 발로 상대편 선체를 밀거나, 심각한 경우 진짜로 충돌사고가 나기도 한다.
내가 정확히 몇 번 상황인지 1초 안에 판단하려면 대회에 몇십 번쯤은 나가봐야 해요
이렇게 되면 현장에서는 빨간 깃발을 흔들면서 Protest(항의)!라고 외친 다음, 경기가 끝나고 나서 정해진 시간 내에 정식으로 청문을 신청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 상황을 청문서에 상세히 작성하여 증인을 대동하고 청문실에서 내 항의가 받아들여지도록 정당성을 다투어야 한다....지금 우리가 스포츠 경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법률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황당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룰이 그렇고 절차가 그렇다.
아무래도 바다는 넓고, 심판이 모든 수역을 커버할 수는 없으니 생긴 나름의 합리적 절차일텐데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서 룰도 어렵고 항의하기는 더 어렵고 청문회까지 하는 건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외국 경기에 나가면 영어로 해야 해서 더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동호인 경기에서는 사실 룰보다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로 간에 다들 룰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다 위에서 큰 목소리로 '스타보드!(내가 권리정이라는 뜻이다)'를 외치면 상대방이 '어... 내가 비켜야 되나?'라고 생각하면서 물러서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이다.
꼭 이렇게 어리버리하지는 않다 해도, 배가 부딪혀서 깨지고 사람이 다치면 피해가 너무 막심하기 때문에 실제 경기에서는 내가 우선권을 갖고있어도 너무 무리해서 다투지 않는 경향도 있다. 딩기같은 경우는 부딪혀봤자 그렇게 큰 손실은 나지 않을 뿐더러 물에 빠져도 쉽게 스스로 올라올 수 있지만, 킬보트나 크루즈 요트는 살짝만 박아도 몇백에서 몇천만원은 우습게 깨진다. 인사사고의 위험성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럴 땐 룰이고 뭐고 그냥 피하시라고요....
깃발 신호도 외워야 했다. 바다 위에서는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안 들리기도 하고, 역사가 오래되어서 그런지 의사소통 방식도 좀 레트로했다. 어떤 깃발은 5분 후 경기를 시작한다는 뜻이고, 어떤 것은 경기가 취소되었다는 뜻, 어떤 것은 오늘 경기가 끝이라는 뜻, 어떤 깃발은 바람이 바뀌어서 경기수역을 옮길테니 다 따라오라는 뜻 등... 무슨 스파이라도 된 심정으로 깃발신호를 달달 외웠다.
팁: 처음 출전할 땐 P하고 I 깃발이 무슨 뜻인지만 알아도 됩니다
그밖에도 우리는 감독님으로부터 출발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략, 경기 중 다른 배에게 가로막혀 바람을 받지 못해 속도가 떨어질 때 취해야 하는 조치, 마크 주변에서 실수로 마크를 건드렸을 때 자진해서 시행해야 하는 벌칙, 경기중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풍하로 갈 때에는 코스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등등을 압축속성스파르타 코스로 배웠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을 당시에 전부 다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선수들이 평생에 걸쳐 익힌 것을 어떻게 한 달만에 다 배우겠는가. 그냥 일단 머릿속에 우겨넣었다.
대회 기간이 다가오자 배를 옮길 준비를 했다. 크레인을 불러서 마스트를 내리고, 그 마스트를 선체에 꽁꽁 묶어 준비를 해 두었다. 울진에서 출발할 때는 우리가 크레인과 지게차를 불렀는데, 대회가 열리는 항에서는보통 주최측에서 크레인을 지원해준다. 크레인이 오는 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경기 자체는 금요일부터지만 우리는수요일에 출발해야 했다. 모두가 전부 이동할 수는 없어서 민진영과 내가 먼저 격포항으로 가고, 나머지 멤버들은 목요일 저녁에 오기로 했다.
새만금에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직 모른 채, 그렇게 우리는 일말의 불안감과 약간의 설렘을 안고 부안으로 떠났다.
부록: 요트를 트럭에 싣는 법
1. 크레인에 줄을 걸어서 11.7미터짜리 마스트에 그 줄을 걸친 후에 쑥 뽑아요. (주의: 모든 것이 완료될 때까지 크레인 기사님께 텐션을 잘 유지해달라고 부탁해요.)
2. 어딘가 굴러다니는 각목을 주워다가 배 위에 동여맨 뒤, 마스트를 그 위에 칭칭 싸매요 (feat. 똥테이프)
3. 지게차 기사님께 트레일러째로 고이고이 배를 잘 들어달라고 부탁해요
4. 25톤 장축 트럭 위에 싣고, 트럭기사님께 우리 배를 안 흔들리게 조심조심 가져가달라고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