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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람 May 11. 2023

요트를 사버렸습니다

재벌이냐구요? 그럴리가요...

사람마다 각자 언젠가는 이루고 싶다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로망이 있 마련이다. 그중 '내 배를 가지고 싶다' 꽤 많은 사람의 버킷리스트에 들어을 것 같다. 그런데 보통 배도 아니고, 요트라면?


요트면허를 따고 나서, 우리는 한동안 갈팡질팡 했다. 일단 면허를 따기 전부터 꾸준히 탔던 딩기를 계속 연습했다. 딩기는 여전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면제교육을 받으며 맛보기로 경험했던 크루즈 요트의 느낌이 자꾸 눈앞에 른거렸다.


실제로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딩기와 크루즈 요트는 바람을 이용해서 항해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장르가 완전히 다르다. 딩기는 혼자 타는 것이고, 거의 반드시 물에 빠지거나 안 빠지더라도 몸이 젖으며, 잠시도 쉬기가 어렵고, 그래서 체력적으로 꽤 지친다. 기는 서핑이나 급류카약 유사한 느낌의 스릴과 긴장을 선사한다.


반면에 크루즈 요트를 타면 웬간해서는 물에 빠지는 일이 없고, 젖어봤자 신발 정도이며, 여럿이 함께 손발을 맞춰볼 수 있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세일(돛) 내리고 쉬거나 엔진으로 항해하는 등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배를 타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그 자유로움이 가장 매력적이다. 크루즈 요트는 포츠와 캠핑, 여행이 결합된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튼 딩기와 크루즈 요트는 자전거와 버스만큼이나 달라서, 서로간에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큰 배... 큰 배가 타고 싶어요! (by Marc Wieland)


요트 입문을 딩기로 한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세일링의 기초를 익혔고 물과도 친숙해졌으며 체력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요트학교에 크루즈 요트가 여러 대 있기는 했지만 지자체 소유의 배인 데다가 면제교육 외의 프로그램이 없었기에 그 배를 타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산이나 인천처럼 붐비는 도시에 있는 마리나라면 배를 차터하거나 얻어타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여기는 울진, 아직 클럽하우스와 계류장은 공사중었고 개인이나 업체 소유의 배는 한 대도 없었다.


그러다가 요트학교에서 우리와 함께 딩기를 배운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배를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새 배지만 중국산이라 비슷한 규격의 유럽산 배에 비해 절반 이하 가격에 무엇보다 주문하면 한두 달만에 도착한다고 했다. 유럽산은 최소 6개월, 길면 1년도 넘게 기다려야 했기에 이것은 무시하기 어려운 장점이었다.


남의_배_구경하는_중.jpg


그 배는 Fareast 28R이라는 기종이었는데, 28피트, 즉 9미터쯤 되는 요트로 레이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선내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고 그래서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했다. 이런 요트는 크기로도, 용도로도 딩기와 크루즈 요트의 중간쯤 되는 개념으로, 보통 '킬보트'라고 부른다.  


특이한 것은 이 배가 '리프트 킬 시스템'이라는 걸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돛이 달린 모든 요트는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배 아래에 몇 미터씩 되는 킬이 길게 나와 있다. 그래서 수심이 깊은 계류시설(마리나)이 있어야 하고, 하부 점검이나 따개비 제거를 위해 배를 육상에 올리려면 크레인으로 들어서 올려야 한다. 그런데 파이스트 28R은 이 킬을 도르래로 올렸다 내렸다 할 수가 있어서 크레인 없이 견인할 차량만 있으면 사람 손으로 육상에 올려둘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요트를 육상에 두었다가 탈 때만 바다에 내릴 수 있고, 견인용 트레일러에 실으면 차로 끌고 갈 수도 있다고 했다.


1톤이나 되는 킬을 들어올리는 도르래의 신비로움


우리는 먼저 배를 산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체험승선을 해 보았다. 면제교육을 할 때 탔던 40피트짜리 크루즈 요트보다 컴팩트한 사이즈였지만 속도가 빠르고 다이나믹한 매력이 있었다. 선내에 침실도 화장실도 테이블도 와인랙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없었지만 데크 위로는 메인 세일과 집 세일, 제네이커까지 큰 요트에 있는 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기에 세일링 기술을 익히고 취미로 주말 요트를 즐기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냐고 하는데 진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기종은 인쇼어 레이inshore race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항에서 10~20분 거리에 있는 근해를 인쇼어라고 하고, 인쇼어 레이스는 바다 위에 일종의 트랙을 설정해 놓고 30분~1시간 동안 돌 수 있는 코스에서 하는 경기를 말한다.


반대로 이보다 먼 거리를 항해하는 경기는 오프쇼어 레이스offshore race라고 하는데,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몇 달간 레이싱을 하며 정말로 세계일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 오프쇼어 레이스를 하려면 숙식이 가능한 시설을 갖춘 요트가 필요하다.


우리처럼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주말을 이용해 세일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쇼어 레이스를 위한 킬보트가 적당 보였다. 물론 더 크고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크루즈 요트로도 인쇼어 레이스에 출전할 수 있지만, 배가 무겁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고 가격도 비싸고 관리도 어려웠다. 이 배는 엔진도 변기도 주방도 수도도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고장 날 곳이 별로 없었다. 항을 출입할 때나 바람이 너무 없을 때를 대비해 고무보트에 다는 것 같은 선외기 엔진을 부착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엔진은 고장 나면 떼어서 수리를 맡길 수 있기에 선내에 엔진이 내장된 배보다 다루기가 쉬웠다.




우리는 몇 주간 조사와 논의,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결국 해를 넘기면 원자재 값이 대폭 올라서 가격도 크게 바뀐다는 소식을 듣고 12월이 가기 전에 요트를 주문하기로 결심했다. 몇 달이지만 요트를 배우고 겪어보니 아무래도 자기 소유의 배가 없으면 계속해서 요트를 타기 어려운 구조이고, 그간 고생해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무로 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상보다 빨리 요트를 사고 말았다.




+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들


1. Size does matter. 배를 사기 전 좀 더 다양한 요트를 타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파이스트 28R보다 작은 배를 샀을 것이다.  대회에 나가기 위해 배를 운송하려면 사람 손만으로 마스트를 내릴 수 있는 배가 다루기 편한데, 이 배는 크레인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이스트는 최소 4~5명의 크루가 있어야 하지만 작은 배는 3명으로도 운용이 가능해서 우리 조건에도 좀 더 적합했다. 파이스트 23R이나 프랑스베네토 First 24, 미국의 J70리프트 킬이면서도 전장이 7미터쯤 되는 요트 사람 손으로 마스트를 내릴 수 있고, 차로 견인하기도 더 쉽다고 한다.


2. 요트를 캠핑카처럼 끌고 다닐 수 있을까? 파이스트 28R은 이론상 트레일러에 얹어 차로 끌 수 있긴 한데 이 배는 너무 커서 견인을 하기보다는 트럭에 실어서 운송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도로주행을 하려면 트레일러에 번호판을 달고 안전검사를 받아야 하고 트레일러 면허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도 실제로 도로에 가지고 나갈 때는 다른 차가 거의 없는 새벽이나 밤에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보통은 번호판 없이 마리나 안에서만 운용하는 트레일러를 쓰고, 배를 옮길 땐 25톤 트럭과 크레인, 지게차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큰 마리나에는 요트 전용 크레인과 지게차, 견인용 트랙터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론적으론 끌고다닐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론...


3. 엔진은 4행정, 4.9마력으로. 5마력이 넘어가는 엔진을 달면 수상동력레저기구 등록을 꼭 해야 한다. 그래서 4마력 2행정 엔진을 다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엔진은 힘이 부족해서 바람이 센 날에는 잘못하면 항을 빠져나오다가 밀려서 계류장에 부딪히게 될 수 있다. 그리고 2행정은 엔진오일과 연료를 섞어서 넣어야 해 번거롭다. 우리는 다행히 4행정 4.9마력 엔진을 달았는데, 2행정 4마력 엔진을 산 팀은 꽤 고생을 한 것 같았다.


4. 육상에 올려두면 되겠...지? 배를 육상으로 올리고 내리고 하는 과정이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고 번거로웠다. 우리는 인원도 네 명이고 몸 쓰는 일에는 이골이 나서 익숙해지니 할 만은 했다. 매번 갈 때마다 배를 띄워 훈련하고 나서 다시 육상으로 올렸는데, 앞뒤로 이 과정이 빨라도 30분씩, 길면 두 시간씩 걸렸다. 일단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온 배와 트레일러에 묻은 소금기를 민물로 씻어고 세차하듯 선체 안팎도 닦아주고, 선외기 엔진에도 물을 넣어 소금기를 빼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파이스트 선주들은 요트를 그냥 바다 위에 띄워놓거나, 한번 육상에 올려두면 몇 달간 바다에 내리지 않는 경우도 꽤 되는 것 같았다.


5. 빨리 온다면서요...? 파이스트 28R는 가성비가 좋아서인지 주문이 밀려서, 처음엔 한두 달 걸렸지만 지금은 이 배도 몇 달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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