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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Oct 14. 2019

23. '모범생'의 변심은 '무죄'

그곳에서 6.25는 '북침'이었다

북한에서 나는 많이 순진했었다. 아니, 순진하게 사육됐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세뇌교육을 받고 외부정보를 접하지 못하다보니 순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의 무지함이었다. 김일성은 '위대한 수령', '민족의 태양', '인민의 어버이', '한 세대에 두 제국주의를 타승한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이었다.  특히 미국을 필두로 한 16개국 제국주의 연합세력의 무력침공을 막아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호해 낸 김일성은 조국을 위기에서 구원해 낸 절세의 영웅이었다. 전후 미국의 북침 야욕을 걸음걸음 분쇄하고 자위의 국방력으로 조국을 지켜낸 김일성은 수호신이었다. 또 그 뒤를 이어 선군정치로 북한을 지켜내고 남한을 떨게 만든 김정일은 '위대한 지도자', '선군영장'이었다. 그런 위대한 수령을 한 명도 아니고, 대를 이어 '모시는 영광'을 안은 '우리 인민'은 복받은 '인민'이었고 그런 위대한 수령, 지도자를 대를 이어 '호위'하는 호위사령부 병사가 된 것은 더 없는 영예였다. 

                    출처: 연합뉴스(호위사령부 직속 포병부대를 방문한 김정은, 왼쪽은 윤정린 호위사령관)


하지만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믿고 충성하던 나의 충성심과 순진함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김 씨 일가를 믿고 충성을 다하고 청춘을 바쳐도 그들이 말하는 '인민의 지상낙원'이 실현되기는커녕 일제 강점기보다도 못하다고 어르신들이 수군거리는 그런 암흑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1990년대 중후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속에서 나의 신념과 충성심은 흔들렸다. 

그리고 그 결정타는 바로 가족이었다. 군복무 6년 만에 처음 찾아간 집에서 내 가족이 굶고 있었다. 1998년 어느 여름 날 군복무 6년 만에 나는 처음으로 집에 갔다. 당시 모시고 있던 상관이 배려를 해 주어서 한 달 분 식량 20kg을 전부 흰쌀로 받아 집에 가져갔다. 하지만 6년이라는 세월의 흔적 치고는 너무도 깊은 부모님 이마의 주름에 울고 빈 쌀독 앞에서 분노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충성분자라도 가족의 굶주림을 보고는 초연해 질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병에 걸려 연구소를 그만 두셨고 어머니는 수술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하셨다. 식량배급도 없는 직장에 꼬박꼬박 출근하는 순진해 빠진 여동생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는 노동당에 입당했었고 부대 정치부 서기 겸 대열서기(인사서기)를 하고 있는데다 노동당 입당, 대학추천 우선권을 부여 받을 수 있는 '모범군인' 칭호도 갖고 있어서 대학 진학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사회대학에 가기만 하면 '군복무', '노동당원', '대학졸업' 등 북한 남성이 출세할 수 있는 기본적인 3가지 요건을 다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을 보고 나는 사회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나는 결국 적성에도 맞지 않는 군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부대에 돌아 왔지만 내내 집 생각이 계속됐다. 마침 여단 지휘부에 빈 자리가 있는 부서가 있었고, '직발'(군관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관, 병사가 군관으로 임관하는 것) 절차를 거쳐 나는 여단 참모부 00참모로 임관했다. 그러나 여단 지휘부에서 근무하면서 북한 체제제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래도 그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출세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군사대학 진학을 추진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때 행방불명 된 줄로만 알았던 막내 이모가 탈북 해 중국에 있다는 기막힌 소식이 들려왔다. 호위사령부 군관들은 진급할 때마다 신원조회를 하는데 이모면 진급이 좌절되는 것은 물론 제대될 가능성이 컸다. 결국 얼마 뒤 나는 전역했다. 그리고 제대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나는 한국행을 할 수 있는 연줄을 알게 됐다. 사실 전역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북한사회의 부조리와 체제 모순은 더 심각했다. 장사를 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가 없는 구조인데도 자본주의행위라며 장사를 막는 북한 지도부는 정말 대책 없는 이기심 덩어리였다. 정치부 서기와 대열서기, 군관생활을 하면서 보고 들은 외부정보도 탈북 결심을 부채질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 때문에 북중 국경지역에 갔다 두만강 너머로 본 중국의 발전상이 결심을 더 굳게 했다. 

                                                      북중 국경의 남양노동자구(북한)


                                                        북한 남양노동자구와 마주한 중국 도문시


내 나이 29살, 아직 피가 끓는 청춘이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나는 내가 나서 자란 그 땅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픈 부모님과 동생들은 같이 떠날 수 없었다. 나도 죽을 지 살 지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이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길이고 가족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대의 마지막 해이던 2004년의 어느 초겨울 날 나는 국경경비대 초병에게 뇌물을 찔러주고 온 몸이 얼어드는 두만강의 차디찬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를 걸치는 먼 여정을 돌고 돌아 가깝고도 멀었던 동족의 나라, 대한민국에 탈북한지 1년 3개월 만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과 환멸이 더 컸기에 '모범생'의 변심은 '무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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