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입대한 나는 군복무를 열심히 해 “모범군인”도 되고 포병부대 포수에서 관측수, 선동원의 일종인 '직관원', 대대 정치부 서기를 거쳐 7년 만에 군관이 되었다. 출장을 자주 다니다보니 평안남도 북창군에 많이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 그곳 주민들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아버지가 남한 출신인 아가씨가 있었다. 나와 병사 때 친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 아가씨와 사귀었다. 문제는 그 아가씨의 출신성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면 북한 기준으로는 동요계층인 것이다. 그 아가씨의 아버지 고향은 전라도 순천이라고 한 것 같았다. 6.25전쟁 때 의용군으로 입대해 북한으로 왔는데 그 아가씨 말로는 노동당에서 우대해줘서 군 양정사업소 초급간부를 하셨다고 한다. 문제는 그 집이 째지게 가난했다는 것이다. 양정사업소 초급간부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는지 몰라도 집은 금방 무너질 것 같이 낡은데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아가씨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지 못하고 식량장사를 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미혼인 남성, 여성들은 무조건 직장생활과 조직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 아가씨는 무직으로 아주머니들이 주로 하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친구는 변두리이긴 해도 집이 평양시인데다 아버지가 인민보안원이어서 출신성분과 토대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아마 그 아가씨와 눈이 맞았던 것 같다. 그런데 둘이 결혼을 해도 그 아가씨의 출신성분으로는 평양시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아가씨는 내 친구가 자기를 버릴까봐 북한에서 당시 의용군 출신들에게 수여했다는 임명장까지 보여주었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건 공수표에 불과했다. 무슨 임명장이었냐면 적화통일이 되면 의용군 출신의 고향에서 간부자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오래되어 낡은 임명장을 보니 전라남도 순천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한다는 내용이고 김일성이 수여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뭐하는가? 이미 그 아가씨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아무리 북한 편에 서서 싸운 의용군이라고 해도 남한 출신은 북한에서 절대 출신성분을 좋게 봐주지 않는다. 써먹을 때는 간 쓸개 다 떼어줄 것 같았지만 박헌영의 남로당계를 다 축출한 후 김일성은 남한 출신들을 철저히 배척했다. 그리고 종이장에 불과한 임명장을 주면서 그들을 달래고 오지나 탄광 같은 데 많이 보냈다. 끝내 그 친구는 제대 될 때 그 아가씨를 집에 데려가지 못했다. 병사시절에는 결혼도 할 수 없을뿐더러 데려 가봐야 평양에서 같이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제대되고 나서도 나는 부대에 남아 군관으로 복무했기에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친구에 대한 원망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게 북한의 현실이었다.
출처: 전쟁기념관
북한은 6.25전쟁 때 서울에서만 의용군 20만 명이 탄원했다고 한다. 물론 해방정국에서 좌익이 많았으니 자원입대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강요와 협박에 못이겨 의용군에 입대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6.25전쟁 때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던 지역에서 이른바 '의용군'에 입대해 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하거나 남은 사람들과 그 후예들의 삶은 북한에서 그리 아름답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