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 선전과 교육은 북한군에서 단골 정치학습 메뉴였다. 북한은 6.25전쟁 때 미군과 한국군이 북한지역에 들어와 무고한 북한주민들과 노동당원들을 대규모로 학살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살사례가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있었다는 대규모 주민학살이었다. 당시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이 불과 52일 사이에 미군에 의해 학살됐다는 것이다. 신천은 북한에서 반미교양의 메카이자 성지였다. 신천박물관에는 미군의 주민학살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잔뜩 붙어있다. 사진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짓을 한 일이 없으니까. 사진은 없고 상상으로 그린 그림들만 도배되어 있다. 또 학살에 사용했다는 도구들도 진열해놓고 있다. 어디서 주어왔는지는 몰라도 녹이 쓴 쇠붙이들을 가득 가져다 놓고 살인흉기라고 교육한다.
신천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반미교양장소가 바로 “400 어머니묘”와 “102 어린이묘”이다. 1950년 북한군 후퇴당시 황해남도 신천군에 미군이 들어왔는데 그 때 주둔군 사령관이 해리슨이었다고 북한은 선전한다. 당시 면 창고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같이 갇혀있었는데 해리슨이 “어머니와 아이들이 같이 있는 것은 너무 행복하다”면서 갈라놓으라고 지시했고 울부짖는 엄마와 아이들을 강제로 떼어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젖과 물을 찾는 아이들에게 미군이 휘발유를 주고 그것을 마신 아이들이 고통에 가슴을 쥐어뜯고 땅을 허비다 숨져갔다고 교육했다. 심지어 해리슨의 지시로 미군이 창고에 불을 지르고 수류탄을 던져 400명의 엄마들과 102명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했다. 이 중 생존한 아이가 있었다고 했고 그가 “400 어머니묘”와 “102 어린이묘”를 해설하는 해설원이 되었다고 했다.
출처: 연합뉴스 신천 400어머니 묘와 102어린이묘
해마다 “6.25~7.27 반미공동투쟁월간”을 맞으면서 신천 땅에는 북한 주민들과 북한군인들, 청소년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미제의 천인공노할 살인 만행과 죄행을 잊지 말고 천백배로 복수하자”는 노동당의 견학독려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은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가는 것이 수학여행이지만 북한 학생들의 수학여행은 증오와 복수심으로 불타는 “복수결의여행”인 셈이다.
1990년대 초중반 북핵문제로 북미간의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김정일은 반미교육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고 전국적으로 반미, 계급교양관이 시, 군마다 건설됐다.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계급진지, 사상진지는 지켜야 한다면서 반미선전과 선동에 더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던 2001년 경 김정일의 뜻밖의 지시가 내렸다. 반미, 계급교양을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지시내용은 이러했다.
...신천에서의 반미 교양도 현실성 있게 해야 한다. 당시 황해남도 신천군에는 미군 한 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한 개 중대가 두 달도 안 돼 3만5천명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맞지 않는다. 믿지 않는 사람이 생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신천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것은 전부 미군의 만행이라기보다는 그 지역에서 공화국에 앙심을 품고 있던 지주, 자본가, 종교인을 비롯한 계급적 원수들의 만행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사실 토지개혁 때 황해남도에서 숙청된 지주, 자본가 등 적대계급이 많았다. 이자들이 속에 칼을 품고 기회를 노리다 인민군대가 후퇴하자 미군의 앞잡이가 되어 노동당원들과 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 한 것이다. 신천박물관을 반미교양뿐 아니라 계급교양의 중심지로 만들어야 한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때부터 신천은 반미, 반한, 계급교양의 성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기는 했다. 신천 주둔 사령관이라면서 “해리슨 중위”라고 북한에서 호칭했었던 것이다. 당시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이 한 개 중대 병력이었는데 중대장에게 무슨 “사령관” 호칭인가? 100명 정도 규모의 한 개 중대가 3만5천명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이는 한 명당 350명을 죽인 셈이 된다. 그야말로 신천을 미군의 홀로코스트로 악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신천 주민 학살의 규모는 북한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며 학살 주체도 미군이라기보다는 우익이었을 것이다. 북한이 광복 후 강행한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라는 명목의 유산계급에 대한 강탈과 가혹한 학대, 학살에 불만을 품었던 우익이 후퇴 때 그 복수를 한 것이다. 결국 “신천대학살”은 서로 상대 진영을 청산, 학살했던 좌, 우 이념대결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북한은 6.25전쟁 기간 저들이 북한 지역과 남한 지역에서 자행한 우익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신천박물관은 반미교양의 선동거점으로 여전히 대를 이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출처: V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