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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Jun 21. 2020

어머니의 밥상

남녘에서 어머니를 그리며(2020 우리가 한식 공모전)

1. 한민족의 주식

흔히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세태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통계청이 조사를 해봤더니 지난해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9.2kg이었다. 이는 국민 1명 당 하루에 섭취하는 쌀밥이 두 공기도 못 미치는 역대 최저 수치다. 30년 전인 1988년에 122.2kg이던데 비하면 절반 이상 대폭 줄어든 양이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한민족의 주식은 밥이었다. 하루 세끼 밥을 먹었고, 조상을 기리는 제사상에도 밥을 꼭 올렸다. 경제발전으로 소득수준이 향상되고 서구식 식습관이 확산되면서 쌀 소비량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밥은 대부분 한국인의 주식이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지만 밥 사랑, 한식 사랑은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더 큰 것 같다. 한국은 워낙 소득수준이 높다보니 한식뿐 아니라 양식, 일식, 중식을 비롯해 다양한 인종과 국가의 음식이 대거 들어 온데다 외식문화가 발달했다. 


외식문화 (출처: 월간 파워코리아)

                                                      

반면 북한은 만성적인 경제난을 겪고 있는데다 식당이 많지 않아 다른 나라 음식문화와 외식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물론 평양 같은 곳에는 외국 음식을 파는 식당도 있고 한식당도 꽤 있지만 대부분 지역과 마을에는 식당이 적거나 없다. 그래서 대부분 북한 주민들은 한식과 집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이후에는 식량난으로 배급체계까지 붕괴되다보니 많은 주민들이 점심밥도 대부분 도시락을 싸서 해결한다. 일반 주민들은 밥 외에는 간식이나 영양보충 수단이 별로 없다. 결국 밥심에 더 의존하는 사람들은 북한 주민들이 아닐까싶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에게는 어머니나 아내가 차려준 밥상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대식구'의 주부

나는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의 한 국경마을에서 태어났다. 4살 때인가 나는 부모님과 둘째 여동생이 아버지가 새로 배치 받은 직장이 있는 평양 교외의 한 마을로 이사가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혼자 떨어지게 됐다. 2대 독자였던 나를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애지중지 돌봐주셨다고 한다. 마른 명태를 잘게 찢어 간장에 찍어 내 입에 넣어주셨고, 집에서 키우던 닭이 낳은 계란도 내 차지였다고 한다. 이렇게 1년가량을 고향집이자, 조부모님댁에서 보내고 나서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가 5살 때였다. 아버지는 연구원이셨지만 읍내에는 당시 빈 주택이 없어 주변 농촌마을에 집을 얻으셨다. 북한의 주택은 법적으로 국가와 협동단체 소유여서 당시 어머니는 협동농장원이 아니셨지만 별수 없이 농장일을 하시게 됐다. 우리 가족이 살던 마을은 ‘남새작업반’(야채농사만 전문적으로 하는 작업반) 마을이었다. 어머니도 채소 농사를 하셨다.     


                                  채소밭에서 일하는 북한 협동농장원들( 출처: RFA)


얼마 지나지 않아 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이 태어나면서 우리 식구는 6명이 됐다. 당시 북한 가정들에서는 자녀를 2~3명 낳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 집은 자녀가 4명인데다 그곳 원주민이 아니고, 함경북도에서 이주해 온 가정이다 보니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아버지가 공급받는 ‘사무원’ 배급과 어머니가 농장에서 받는 분배, 4자녀의 몫으로 받는 배급으로는 돌도 씹어 먹을 기세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우리의 식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우리 4남매가 배를 곯지 않게 하려고 정말 많은 애를 쓰셨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석탄불에 밥을 하고 꼭 국을 끓여 밥상을 차리곤 하셨다. 우리 4남매는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나 아침밥을 꾸역꾸역 먹곤 했다.      


3. 우리 집 주식과 부식

아침밥은 보통 옥수수쌀로 지은 강낭밥에 흰쌀 조금 들어간 밥이었다. 흰쌀과 옥수수를 2:8, 혹은 3:7의 비율로 배급하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집들은 콩 농사도 좀 지어 메주된장도 만들고, 닭도 좀 키워 계란도 가끔 먹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집은 그럴 형편이 안 됐다. 다행히 어머니가 채소 농장에서 일하시다보니 오이나 가지, 대파, 양배추, 토마토, 배추, 무 같은 제철 채소들을 조금씩 얻어다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물론 집 뒤에 있는 조그만 텃밭과 울타리 주변에 심어놓은 오이나 가지, 토마토, 대파, 그리고 옥수수를 심은 뒤 2모작으로 심은 배추, 무도 살림에 보탬이 됐다.

오이로는 김치도 만들고, 냉국도 만드셨다. 오이냉국은 채칼로 얇게 썬 오이를 찬물에 넣고 평양간장에 식초 몇 방울, 그리고 파를 썰어 두고 만드셨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먹으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가지는 기름에 볶아 송송 썬 파를 넣어 만들어 주셨다. 양배추도 볶아내서 파를 둔 다음 밥상에 올리셨는데 양배추 볶음도 맛있었지만 약간 달큰한 국물에 밥을 쓱쓱 비벼먹으면 그 또한 별미였다. 토마토에 계란을 두고 끓인 국도 맛있었다. 북한에서는 ‘수부국’이라고 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배추나 무로도 볶음 반찬을 만들거나 국을 끓여 밥상에 올리셨는데 갓 밭에서 뽑아 만든 반찬과 국은 구수하고 맛 있었다.      


4. 김치는 半식량

북한에서는 김치가 ‘半식량’이다. 그래서 김장철에는 부모님을 도와 집 텃밭에서 수확한 배추, 무와 아버지 직장, 어머니 작업반에서 공급받은 배추, 무를 합쳐 김장을 3~4독 만들곤 했다. 김치움 만드는 것은 아버지와 내 몫이었다. 땅이 얼기 전에 집 텃밭의 흙을 1.5m 정도 파내고 김치움을 만들었다. 김장독을 김치움에 넣고, 생무도 몇 십개 넣은 다음 옥수수 짚으로 숨구멍을 만들어 놓고 흙을 다시 덮으면 김장 끝이었다. 김장은 배추김치와 무 깍두기, 갓김치를 까나리를 삭혀 만든 젓갈과 명태를 양념과 버무려 소금물에 한 번 절여 속을 죽인 배추 안에 골고루 넣어주면 됐다. 


                                                   함경도식 동태 배추 김치(출처: TV 조선)


부모님의 손맛이 좋아 그런지, 아니면 평안도쪽과는 방식이 다른 함경도식 김치여서 그런지 우리 집 김치는 맛있기로 정평이 나 동네 이웃들이 많이 얻어가곤 했다. 다음해 보리고개가 오기 전까지 김치는 우리 집 밥상의 메인 반찬이곤 했다. 하루 세끼, 매일 강낭밥을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는 낮에 옥수수면을 물에 담가두었다가 잘 삶아서 오이 냉국이나 콩국에 말아 저녁밥상을 차려주셨는데 정말 맛있었다. 겨울에는 김치를 잘게 썰어 기름에 볶다가 물을 부어 만든 국물에 옥수수면을 말라 온면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 맛도 괜찮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온면을 더 좋아했다.      


5. 어머니의 도시락

아버지를 내조하고, 우리 4남매를 키우면서 어머니가 가장 힘드셨을 부분 가운데 하나가 아마 도시락 싸는 일이었을 것이다. 가정밥상은 식구들끼리 먹는 것이니 누가 흉 볼 일도, 비교당할 일도 없지만 점심 도시락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와 우리 4남매 모두 직장과 학교가 집과 꽤 떨어져 있는 거리에 있어서 점심에는 항상 도시락을 싸가곤 했다. 그런데 점심 도시락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직장 동료, 같은 반 학생들과 함께 모여 먹어야 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누구 도시락이 어떤지 알게 되고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북한 주부들은 남편, 자녀 도시락 싸는데 무척 신경을 쓴다. 자기 남편, 자식을 남보다 더 당당하게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 같지 않겠는가. 아버지와 우리 4남매를 누구보다 사랑하셨던 어머니는 오죽 하셨을까? 하지만 가정 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더구나 아침 밥상도 차리고 점심 도시락 5개를 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 도시락(출처: 데일리NK)


그래서 우리 4남매의 도시락은 보통 흰쌀과 옥수수쌀이 5:5 정도 섞인 잡곡밥과 김치, 지진 두부, 까나리 반찬, 고추장 정도였다. 형편이 좀 나은 친구들은 흰쌀밥에 지진 계란이나 삶은 계란, 까나리 반찬, 메주장을 싸왔다. 농촌 학교에 다닐 때 학급반장을 하고 반 1등, 2등을 하던 나였지만 점심 도시락을 꺼낼 때는 좀 부끄러웠다. 집안 사정이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가끔은 ‘우리 집은 왜 잘 살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어머니라고 그런 나나 동생들의 속마음을 모르셨을까? 아마 어머니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철이 들면서 다른 집보다 많은 4남매를 키우시느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얼마나 애쓰시는 지 잘 알다보니 그런 생각이 없어졌다. 거기다 다행히도 고등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이 읍내로 이사하면서 점심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됐다. 학교와 집 사이가 도보로 불과 15분 거리여서 점심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6. 감자농말가루 음식

언제부터인가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4남매를 굶기지 않으시려고 가을철이면 휴가를 내셔서 외갓집이 있던 함경북도 연사군에 다녀오곤 하셨다. 대홍단과 접한 연사군은 감자고장이다. 연사에는 감자를 수확해도 나머지 이삭 감자가 많았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삭 감자를 잔뜩 주어 외갓집에서 말린 다음 농말가루로 만들어 오셨다. 언감자 가루도 힘껏 지고 오셨다. 그리고 감자 농말가루로 농마국수도 만들어 주시고, 언감자가루떡도 만들어 주셨다. 

                                                           북한 농마국수(출처: 경남대 북한문제 연구소)


부모님이 연사에 다녀오시면 우리 집은 물론 옆집들도 명절이었다. 평안도 지역에는 함경북도에서 나는 감자처럼 전분이 많이 함유된 감자가 나지 않았기에 함경북도 농마국수나 언감자가루떡은 평안도에선 완전 별미였기 때문이었다. 가마에 물을 끓이면서 동시에 그 위에 국수기계를 설치하고 바로 눌러먹는 감자농마국수는 정말 맛 있었다.     


7. 명절 밥상

명절이 오면 부모님은 그 전날 밤부터 명절 음식 준비로 바쁘셨다. 흰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초벌 반죽하고 그 반죽을 다시 가마에 쪄낸 다음 송편과 절편을 만드셨다. 송편에는 줄당콩을 삶아 사카린이나 형편이 괜찮을 때는 설탕을 넣어 만든 속을 넣은 다음 밥그릇으로 찍어내 모양을 냈다. 삶은 줄당콩속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나는 속이 작은데도 숟가락으로 계속 퍼먹곤 했다. 그리고 명절 당일 아침에는 찹쌀을 시루에 쪄낸 다음 찹쌀떡을 만들곤 했는데 내가 10살이 돼서부터는 절구질을 했다. 거기다 송편을 만들고 남은 줄당콩 속이나, 콩가루를 묻혀낸 다음 설탕이나 꿀에 찍어먹곤 했다.

명절날이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돼지고기로 끓인 국이었다. 국가에서 공급해 주는 돼지고기 1kg 정도로 국을 끓여 아침밥상에 올려놓으면 명절밥상 완성이었다. 지진 두부나 두부전골도 단골 명절 메뉴였다. 명절 전날이면 두부집에는 두부 사러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1990년대 이후에는 시장에서도 두부를 많이 팔아 두부집 장사진은 엷어졌다. 나는 두부를 워낙 좋아했는데 그래서 어머니는 두부를 사온 날이면 나를 부엌으로 불러내 평양간장에 갓 만들어 김이 나는 두부를 찍어 먹으라고 권하곤 하셨다. 집에서 망으로 콩을 갈아 삶아낸 다음 간수를 두고 두부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찰떡과 송편, 절편, 그리고 돼지고기 국, 두부전, 두부전골, 여러 가지 볶음 채소는 우리 집의 명절 메뉴였다.   

   

8. 돼지 잡는 날

농촌 마을에 살 때 우리 집에서는 인민군대 지원물자로 바칠 돼지를 키우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농장원들은 1년에 한 번 돼지고기 50kg을 의무적으로 바치게 됐다. 먹을 식량도 부족한 형편에서 돼지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료나 부산물이 적어 비름을 비롯한 돼지풀을 뜯어다 먹여 키웠다. 옆집에서 쌀뜨물을 얻어다 먹이기도 했는데 다른 집들도 대부분 돼지를 키워야 해서 얻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정도 돼지를 키워 집에서 잡곤 했는데 그런 날은 명절이나 다름없었다. 50kg을 바치고 남은 돼지머리나 내장, 돼지가죽 같은 것은 가정에서 처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돼지를 잡은 날이면 돼지 머리와 내장을 삶으셨다. 또 소금으로 여러 번 깨끗이 씻어낸 돼지 소장과 대장에 피와 찹쌀 조금, 흰쌀과 배추를 넣고 순대를 만드셨다. 돼지 피가 남으면 돼지 피밥을 만드셨다. 


                                                                     북한식 순대(출처:NK조선)


우리 4남매는 부엌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에 군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돼지머리 고기와 내장, 순대가 익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다. 다 익으면 부모님은 나와 동생들에게 심부름을 시켜 동네 어른들과 이웃집 아버지들을 모셔왔다. 돼지머리 고기와 내장, 순대는 그릇에 담아 이웃집들에 조금씩 맛이라도 볼 수 있게 돌리곤 했다.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과, 이웃집 아버지들은 돼지머리 고기와 내장, 순대를 안주 삼아 술상을 펴셨다. 어머니와 음식 마련을 도운 옆집 아줌마, 그리고 우리 4남매는 다른 상에서 돼지머리 고기와 내장, 순대를 맛있게 먹곤 했다.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좋으셔서 우리 집에서 돼지를 잡는 날이면 손님이 많았다.     

 

9. 그리움의 밥상

17살,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군에 입대했다. 10년 간의 군복무를 위해 떠나가는 나를 환송하러 역까지 따라오신 부모님은 물론이고 동생들도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런 가족을 뒤로 하고 나는 북한에서도 산골로 소문난 부대 주둔지로 떠나갔다. 불과 며칠이 안 돼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에 눈물이 절로 났다. 

군복무 중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배고픔이었다. 물론 부대에서 밥을 주지만, 한창 돌도 삭일 나이의 10대 병사에게는 당연히 성에 차지 않았다. 흰쌀은 정말 셀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섞이고 옥수수쌀이 대부분인데다 증기식으로 밥을 해서 양만 많아 보이고 실속은 없었다. 거기다 반찬은 염장무와 염장배추, 정체를 알 수 없는 막나물, 국거리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멀건 소금국이 병사 생활 식단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명절이면 떡도 주고 돼지고기도 조금 주지만 보통날은 정말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바로 배가 고팠다. 규율생활, 집단생활에 훈련과 각종 작업으로 육체적 부담과 스트레스가 많아 더욱 배가 고팠다. 영양실조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배고픔에 잠들기 힘든 날이면 어머니가 정성들여 차려주시던 밥상이 생각났고,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늘 맛있는 별식은 아니더라도, 당신은 배를 곯으면서도 자식들만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사랑과 정성을 담아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과 군대 밥상의 괴리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다.      


10. 남쪽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한국에 홀로 정착할 때도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아무래도 나는 ‘혼밥’을 먹을 때가 많았다. 또 경제적 형편 때문에 외식을 자주 할 수 없어 혼자 밥을 만들어 차려 먹을 때면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메곤 했다. 나 하나 먹을 밥상을 차리려고 해도, 귀찮고, 메뉴 선정과 조리가 어려운데 어머니는 6식구, 나중에는 할아버지까지 모시면서 7식구의 밥을 어떻게 매끼 차리고, 도시락을 싸셨을까? 어머니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고 속상하실 때가 많았을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밥상(출처: 익산신문)

어머니의 가족 사랑이 녹아 든 밥상은 위대한 밥상이었다. 그 밥상은 어떨 때는 어머니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무심히 넘기곤 했던, 그 음식들을 만드시느라 어머니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셨을 것이고, 혼과 에너지를 불태우셨을 것이다. 어떨 때는 음식 투정을 하는 이 철부지 아들 때문에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셨으리라. 군복무 6년 만에 처음 집을 찾아간 이 맏아들에게 예전과는 너무도 다르고 초라한 밥상을 차리시면서 1998년 어느 여름날, 어머니의 어깨는 한없이 작아지셨을 것이었다. 

12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2004년의 어느 가을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 아들의 밥상을 차리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아픈 아버지 대신 마음속으로나마 기대고 싶으셨던 이 아들의 한국행 선언은 어머니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꼭 성공해서 어머니를 도와드리겠다며 이 아들은 그렇게 홀연히 집을 떠났다. 그리고 이 밤 어머니를 그린다. 17년 간 어머니가 이 아들을 위해 만든 그 수많은 밥과 국, 그리고 반찬들... 어머니의 밥상이 나를 키운 자양분이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군복무 12년, 제3국에서의 1년 반, 한국 정착 십수년을 버티게 한 정신력과 의지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떠나던 그때에는 10년이면 통일이 되리라 생각했다. 곧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6년이 지났고, 아직 통일의 미래는 요원하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라고, 곧 아빠가 될 이 아들이 그 사랑에 보답할 날은 과연 언제일까? 통일이 되면 어머니가 만드신 밥을 먹기만 했던 이 아들이 밥상을 차려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다. 어머니를 모시고 맛집 투어도 다니고 싶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이 아들은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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