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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Nov 07. 2021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5)

1998-2000

중간에 있었던 다른 가수와의 협업 앨범이나 싱글 등을 제외하면, 지금껏 다루어 왔던 솔로 앨범 2개와 N.EX.T의 앨범 4개를 통해 신해철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차적으로 완결 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과정은 신해철이라는 소년이 마침내 어른이 되는 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나긴 여정이 완결됨과 동시에 밴드 N.EX.T는 파탄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과정을 겪으면서 말 그대로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의 열정 자체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N.EX.T의 해체 과정이 그에게 끼친 영향 또한 분명해 보인다. 신해철에게 있어 밴드라는 건 삶의 목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밴드 해체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간 신해철은 불과 반 년 만에 자신의 앨범을 내놓는데, 지금까지의 패기 넘치던 모습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인다.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가장 사랑받는 노래는 단연 [일상으로의 초대]겠지만 그걸 제외하면 앨범 전체의 분위기는 쓸쓸하고 자조적이다. 


지금껏 쌓아온 게 모두 사라진 것 같아요
괜찮아요 금세 다시 일어날 거예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 누구도 내일 일을 알 수 없어요

-신해철, [It's Alright]


선생님 제게 가르쳐 주신 건 모두 거짓말이었나요
책에서 본 것과 세상은 달라요
그때도 알고 계셨었나요
어른이 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 했었죠
지금은 그게 습관이 됐어요
아무런 생각이 없이

-신해철, [매미의 꿈 Part 4 매미의 꿈]


언제나 소년이기를 바라는 신해철이었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곁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음악적 동지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오히려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신해철은 자신의 삶 자체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로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내 선택은 처음부터 어긋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건만 지금의 내 모습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는 유례없이 강한 어조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신해철,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이제 신해철은 더 이상 [Here I stand for you]에서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을 믿는다고 읊조리던 그 소년이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설픈 어른일 뿐이다. 그렇기에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노래다. 수십 차례에 걸쳐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신해철은 자신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 들어간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1999년의 마지막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다시 한 번 도출한 대답을 내놓는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
(...)
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생전 자신이 죽는다면 묘비에 노랫말을 새겨주길 바란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큰 애정을 보였던 노래인 [민물장어의 꿈]은, 어른이 된 신해철이 끝내 세상과 맞서 싸운 끝에 내놓은 해답에 해당한다. 스스로를 깎고 자르면서, 그렇게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포기해 가면서까지 그가 추구한 것은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그것을 도전이라 칭하든, 혹은 변화라 표현하든 간에, 그는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한 여행을 떠나겠노라 말한다. 그건 본질적으로 소년 신해철의 자아 확립을 위한 여정일 것이었다.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이후 영국에서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신해철은 길지 않았던 솔로 생활을 청산하고 현지에서 밴드를 결성한다. 철학자의 이름을 딴 새로운 밴드의 이름은 비트겐슈타인. 이전 앨범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결론을 내린 신해철은 다시금 본래의 경쾌하고 긍정적인 노랫말로 되돌아간다. 이 시절 그는 스스로가 소년이 아닌 어른임을 완전히 인식하고,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일정부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미래를 착실히 그려 나갔다. N.EX.T 4집이 신해철의 음악 인생 제1장의 화려한 마무리였다면, 비트겐슈타인 1집은 인생 제2장의 차분한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맘에 드는 모습은 아니지만
하지만 나 지금 이대로 우리 다 이대로
그냥들 열심히 사는 게 내겐 너무 좋아만 보여
옛 동네 어느새 변해 버리고
우리도 딱 그만큼 변해 버렸지만
죽는 날까지 가져갈 우리 기억들 
또 약속들

-신해철, [Friends]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새 시작과 함께, 그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신해철의 음악적 삶은 점차 내리막길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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