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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Dec 27. 2023

백합만화소고 - 왜 백합을 보는가

백합만화 이야기

백합. GL(Girl's Love)이나 일본어 '유리'로도 표현되는 백합은 여성 간의 애정을 주제로 한 서브컬쳐 작품을 말한다. 남성간의 사랑을 다룬 BL(Boy's Love)은 대부분 여성들에 의해 소비되며 웹소설이나 만화 분야의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백합의 소비층은 남녀의 구분이 크지 않고, 주로 만화에 치중해 있으며, 매출 또한 훨씬 적다. 말하자면 백합은 서브컬쳐 중에서도 마이너한 장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백합을 보는가? 현인 원사운드는 일찌기 게임을 하는 이유에 대해 "오락하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라고 갈파한 바 있다. 백합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데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좋아하는 거다. 그럼에도 굳이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본성이야말로 백합 장르의 본질이다. 




백합은 여성 간의 애정을 다룬다. 그 범주는 작가와 작품의 성향에 따라 손을 잡는 수준의 플라토닉에서 노골적인 성애까지 다양하다. 주역들의 연령대는 대체로 10대 후반의 고등학생이 많고 20대 이상의 성인 사회인을 다루는 경우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건 단순히 젊고 예쁜 여자아이와 교복의 조합이라는 상업적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0대 후반이라는 나이는 한 사람이 아이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누구나 자아를 확립해 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회의에 빠지고 때로는 좌절에 부딪히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재구축할 때 비로소 아이는 성인이 된다. 


백합은 그러한 파괴와 재구축을 다룬다. 동성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그 인물의 평온했던 이전의 삶을 무너뜨린다. 인물은 삶의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한 과정을 극복하고 마침내 애정을 쟁취할 때, 그로 인해 자아가 실현된다. 그렇기에 백합은 본질적으로 성장물일 수밖에 없다. 20대 이상의 성인이 주인공인 경우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백합 만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성인은 그저 숫자상의 나이가 어른일 뿐 내면은 어린아이와 다름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냉엄하기 그지없는 사회 속에서 그들은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그리하여 정말로 '성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단지 성장을 다루기 위해서라면 굳이 백합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흔히 말하는 소년만화의 대다수는 성장물에 해당된다. 평범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만화도 마찬가지다. 백합 만화가 그 장르만의 특색을 가지는 건, 백합의 본질이 '받아들여짐'에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동성애란 대체로 배척의 대상이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감정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백합은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극복의 과정을 다룰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극복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편의주의적인 경우가 다반사다. 작품에 따라 경중이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백합물에서 동성애 자체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손쉽게 받아들여진다. 그 부분이 현실 세계와는 다르다. 주역들이 사회적 시선에 괴로워할 때조차 주변 인물들은 그들의 애정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들이거나 아예 같은 동성애자들이다. 혹은 부정적인 사회의 시선 자체를 아예 배제하고 동성애가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전개조차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편의주의적인 전개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전개야말로 백합의 본질이다. 


서브컬쳐의 주된 소비자들은 이른바 '오타쿠'로 대표되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만화와 장르소설의 소비는 기존 사회에서 '어른스럽지 못한 취미'로 인식되곤 한다. 그렇기에 서브컬쳐의 소비자들은 항상 인정받기를 원한다. 자신의 취미가, 자신의 취향이,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갈구한다. 


백합은 그 점을 정확하게 관통한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감정 자체가 작품 내에서 자아와 외부 간의 충돌의 불씨가 된다. 하지만 그 충돌은 손쉽게 해결된다. 그건 해결 가능한 갈등,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 극복이 예정된 난관이다. 이 과정을 통해 통해 백합의 소비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 사회로부터의 인정. 타인으로부터의 받아들여짐. 그건 서브컬쳐 장르를 즐기는 사람들 대다수가 가장 갈구하는 것이다. 백합은 바로 그 부분을 충족시킨다.    




백합 작품 속의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는 꽤나 다르다. 사소하게는 남자가 배제되고 예쁜 여자들만이 잔뜩 모여 있는 세계라는 점에서부터, 크게는 타인에 대한 관대함과 받아들임의 폭이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부분까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창작물은 욕망의 반영이다. 백합이 우리의 현실과 다른 또다른 현실을 그린다면, 그건 작가나 독자가 바라는 현실이 그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당신이 '나'를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백합만화를 한 번 읽어보는 게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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