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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Dec 17. 2020

하루키 '쥐 4부작',
그래서 또다시 섹스 이야기

  갑작스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난 주말에 문득 책장 가장 위쪽에 꽂힌 하루키의 책을 뽑아서 읽기 시작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1973년의 핀볼’을 읽고,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댄스 댄스 댄스’를 읽었다. 이른바 [쥐 4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연작 소설이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끝까지 읽고 나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십대 후반에 처음으로 읽었던 ‘댄스 댄스 댄스’는 흡사 도스토예프스키에 비견할 만한 인류의 위대한 성취였다. 이십대에 읽었던 쥐 4부작 중에서는 단연 서사적 완결성과 논리적 합당성이 존재하는 ‘양을 쫓는 모험’이 가장 뛰어났다. 삼십대에 읽은 쥐 4부작은 꽤나 지리멸렬해서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흔 살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읽은 후, 나는 생각했다. 이게 어른이 된다는 거구나. 


  쥐 4부작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무척 많다. 무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고, 메타포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의 반복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자아와 세계에 대해 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오늘의 주제는 섹스다. 모두가 좋아하는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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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 남자에게 있어 성욕은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섹스를 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많은 성취를 이루어내도록 했다. 그러나 섹스는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하늘이 내린 외모를 가진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평범한 남자들은 한 번의 섹스를 위해 수천 줄이나 되는 대사를 주워섬기고 기분을 맞춰 주고 아양을 떤다. 그러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인간이란 심지어, 아무런 노력 없이 불로소득을 얻고자 하는 본성마저 있다. 


  그래서 결국 많은 남자들이 모여 그러한 상상을 해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엄청 예쁜 여자가 먼저 다가와서, 내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와 섹스해 주고, 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도, 나를 좋아해 주고, 그러면서도 연애에 수반되는 온갖 골치 아픈 고민과 어려움 따위는 일절 없으면 좋겠다는, 그야말로 날강도 같은 꿈을 꾸었다. 


  사실 상관없는 일이다. 단지 꿈꾸는 게 대체 무슨 잘못이 되겠는가? 그저 상상일 뿐이니까. 


  그리고 하루키는 그러한 유아기적 상상을 활자로 만들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 놓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세상이란 말인가. ‘나’는 맥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고, 괴이한 비유를 들먹인다. 그러면 여자들이 먼저 다가와, 무심한 척 행동하면서, 섹스를 해준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꺼내는 만큼의 노력조차도 필요치 않다. 심지어 최소한의 맥락조차 없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쌍둥이가 ‘나’의 집으로 와서 동거하며 섹스를 한다. 그리고 ‘나’는 현실의 섹스를 위해 수반되는 일체의 구질구질함을 모조리 생략해 버리고서 아주 깔끔하고 담백하게 섹스를 한다. 아름다운 귀 모델과 저녁 약속을 잡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잠자리를 제안하고, 친구의 집을 방문하자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 창녀를 불러준다. 그리고 또 섹스. 섹스. 섹스.


   사방이 섹스로 가득하다. 마치 블랙홀이 주변의 물질을 빨아들이듯 ‘나’는 섹스를 빨아들인다. 그럼에도 ‘나’는 섹스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상대가 다가와서 섹스를 제안한다. 이쯤 되면 상대는 이미 애인이 아니라 어머니에 가깝다. 흡사 갓난아이가 입을 벌리고 있으면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넣어주는 어머니처럼, 여자들은 다가와서 자발적으로 섹스를 제공한 후 불필요한 골칫거리가 생기기 전에 자발적으로 사라진다. 유아기적 상상이란 바로 그런 뜻이다. 그 어떤 대가도 없는 일방적인 봉사. 불편함이 제거된 순수한 열락.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저 상상일 뿐이니까. 


  다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어른이란 현실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댄스 댄스 댄스’에서 ‘나’는 처음으로 섹스를 거절한다. 대사건이다. 엄청난 일이다. 자신보다 열 살 이상이나 어린 젊은 여자가, 언제나처럼 비현실적으로 먼저 다가와서 섹스를 제안했다. 지금까지의 ‘나’는 그럴 때마다 아무런 사양 없이 생물학적 절차에 따라 발기하고 사정해 왔다. 수십 번이나, 수백 번이나. 그런데 처음으로 거절한 것이다. 지금은 이러면 안 될 것 같다고,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 같다고.  


  그래. 결국 마지막에는 그녀와 섹스한다. 하루키가 원래 그렇겠거니 하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이제는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는 어른이다. 이제는 무조건적으로 쾌락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쾌락을 주기도 하는 존재다. 섹스란 특정한 형태를 지닌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드디어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한 셈이다. 서른 네 살의 나이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달나라 세계가 아닌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쥐 4부작은 어른을 위한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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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에 와서야 깨달은 우연이지만, 지금 내 나이는 ‘댄스 댄스 댄스’를 썼을 때의 하루키와 같다. 어쩌면 그래서 이 소설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이십여 년 전의 나처럼 ‘댄스 댄스 댄스’가 엄청난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장 사이사이에 스며든 작가의 부담감과 어찌할 수 없는 지리멸렬함도 눈에 뜨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이 더욱 좋아졌다. 내가 헛되이 나이만 먹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 이제는 나도 어른이 된 거라고 따뜻하게 말해 주는 것만 같아서. 단지 착각일 뿐이더라도 여하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이 글은 이렇게 마무리하도록 하자. 해가 지면 눈을 감지만 다음날이면 다시 눈을 뜨고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을 위해서.  


  유미요시, 아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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