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Nov 05. 2024

도망치지 못했어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42

연차를 냈습니다. 지금은 카페에 앉아 있습니다. 몇 해 전, 글을 연재하던 시기에 종종 마감이 빠듯한 시기가 있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오늘처럼 하루 연차를 내고 이 카페에 앉아서 온종일 원고를 썼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이유 때문에 이곳에 들른 게 아닙니다. 그저 쉬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병원을 찾아서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하고서부터 고작 이틀이 지났을 때, 갑작스레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 요즘 보면 또 아플까봐 걱정이 돼.' 그냥 싱긋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내는 가끔씩 점쟁이나 무당에 가까우리만큼 감이 날카로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번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약 봉투를 숨겨 두고 잠들기 전에 몰래 먹습니다. 병원에 가는 날은 조퇴를 하다 보니 귀가가 늦어지는데, 일부러 카페에서 앉아 있다가 평소 퇴근 시간에 맞춰서 집으로 갑니다. 집에서는 가급적 평소의 모습을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그 노력은 일정부분 실패로 돌아간 것 같지만 말입니다. 


아내도 저만큼이나 많은 스트레스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일에 치이고, 집에서는 사춘기 딸아이에게 시달립니다. 제가 보기에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결코 저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저처럼 약을 먹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은 건 단지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높아서일 뿐입니다. 하지만 역치가 높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저 억누르고 참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지요. 그런 아내에게 또 하나의 근심거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하루 연차를 내고 카페에 앉아 있습니다. 쉬기 위해서. 

쉬고, 좀 더 멀쩡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두어달 전, 다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한동안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제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무렵 갑작스레 어떤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말하자면 우리 가족이 해외로 나가서 몇 년 동안 살 수 있는 가능성이었습니다. 


물론 그 가능성이 높지는 않았습니다. 퍼센테이지로 말하자면 기껏해야 20% 정도였을까요. 그런데도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 무렵 저는 심적으로 너무나 고달팠습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고, 어디로든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해외로 나가서 살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매력적인 가능성이었습니다. 


저는 마치 해외로 나가는 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매일 인터넷을 검색해서 해당 국가의 주거환경을 찾아보고 주택 임대차 제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고, 입학 요건과 학비를 확인했습니다. 해외에 거주한 사람들의 후기를 몇 개나 읽어 보았습니다. 심지어 외국어 수업 클래스까지 찾아봤습니다.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하여 주변에 떠들고 다니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하게 도망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상했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도망칠 곳이 사라졌다는 현실을 실제로 확인한 그 순간 저는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그 얼마 안 되는 알량한 가능성만이 제게 남아 있었던 마지막 희망이었던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희망과 절망은 고작 차이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법이죠.


그래서 해외로 몇 년 동안 도망치는 대신, 고작해야 카페로 하루 동안 도망쳐 왔습니다. 이렇게. 




오늘처럼 사람 적은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마치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수면에서는 태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일렁일지언정 수심 깊은 곳은 어둡고 고요하지요. 간혹 지나가는 심해어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저 가만히 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 느낌이 저의 조그만 행복입니다. 너무나 작고 미약한 행복이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그것조차 절실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 재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