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짜리 제주도 보름 여행 - 여덟째 날
아침에 아이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아빠. 오이 좋아해?”
“응. 좋아해.”
“아빠. 당근 좋아해?”
“응. 좋아해.”
“아빠. 배추 좋아해?”
“그저 그래.”
“아빠. 양파 좋아해?”
“아니. 싫어해.”
“아빠. 감자 좋아해?”
“응. 좋아해.”
그리고 또다시 아이가 물어보려 해서 내가 선수를 쳤다.
“아빠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예쁜 우리 딸.”
그러자 딸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지금 채소 이야기하는 중이잖아. 그런 말은 하지 마.”
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오랜만에 제주 시내 쪽으로 나갔다. 오늘의 테마는 여행이다. 그간 매일처럼 맘껏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는데, 가끔씩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구경을 다닐 필요도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 모처럼 서둘러 집을 나왔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법이다.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는 IT업종의 여러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곳이다. 명칭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분함과는 달리 흥미로운 장소가 곳곳에 숨어 있다. 예컨대 세미양빌딩에 위치한 문화공간 ‘낭’이 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과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실내 놀이터가 합쳐져 있는데, 장서는 많지 않고 놀이기구도 두엇 정도가 전부지만 공간 자체가 워낙 시원하게 뚫려 있어서 앉아 있노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평일 오전이기 때문인지 내부는 텅 비어 있어 한적했다. 아이가 노는 동안 유유자적하게 책을 뽑아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얼마 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단체로 들어오면서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급히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왔다.
유명한 카카오의 본사도 이곳에 있다. 카카오 스페이스라는 건물에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며 VR 체험공간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은 스페이스 닷원 1층에 위치한 조그만 카카오프렌즈 카페 겸 샵이다. 이곳에서는 제주도 한정품인 해녀복장 카카오프렌즈 인형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물품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진정한 인기 상품은 인형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일회용 비닐봉지다. 구입한 물건을 담아주는 비닐봉지는 장당 백 원에서 삼백 원 사이의 가격인데, 카카오프렌즈 캐릭터가 그려져 있어서 사람들이 여러 장씩 사 가는 경우가 많다. 자. 카카오를 이렇게 열심히 홍보했으니까 브런치가 내게 뭐라도 하나쯤 주지 않을까? 안 주면 어쩔 수 없고.
첨단과학기술단지를 떠나 서쪽으로 십여 분쯤 가면 넥슨 컴퓨터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지난 20세기에 나어린 게이머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들을 위한 성스러운 공간이다. 아타리부터 시작해 소니와 닌텐도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출시된 대부분의 콘솔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게임 패드를 직접 쥔 채 플레이해 볼 수도 있다. 금성사의 배불뚝이 브라운관 TV에 연결된 채 작동하고 있는 패미컴용 슈퍼마리오 월드를 플레이하고 있노라면 문득 행복마저 느껴진다. 입장료가 꽤 비싼 편이지만 게이머를 자칭하는 자라면 반드시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점심은 제주도에 올 때마다 한 번씩은 꼭 사 먹는 김만복김밥으로 정했다. 네모지고 큼지막한 김밥 안에는 전복을 섞어 지은 밥과 큼지막한 달걀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게 정말이지 꿀맛이다. 게다가 오징어무침을 함께 주문하면 그야말로 최고. 관광지의 맛집이라는 게 대체로 별 것 없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김만복김밥은 항상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물론 아이도 잘 먹는다. 애당초 가족여행에서 아이가 싫어하는 식당으로 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아내는 김밥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그래서 저녁은 평대리의 이른바 맛집으로 정했다. 인터넷 검색에 일가견이 있는 아내의 말로는 셰프가 홀로 운영하는 원 테이블 식당이라 했다. 실제로 가보니 사장 겸 셰프 말고도 직원이 하나 더 있었고, 테이블은 넷이었으며, 의자는 스무 개나 있었다. 게다가 뭔가 애매모호한 앤티크 인테리어까지 더해져서 아무래도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식당처럼 여겨졌다. 물론 원 테이블이라더니?라고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무릇 현명한 남편은 아내의 잘못을 지적하지 아니하는 법이다. 다행히도 맛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명란과 양상추와 아보카도와 튀긴 마늘과 각종 소스를 곁들이고 그 위에다 딱새우 대가리 다섯 개를 장식한 괴상망측한 아방가르드 양식의 비빔밥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맛이 좋았다. 다만 파스타는 지옥의 불길로 볶아낸 것처럼 매웠다. 그래서 나는 매운맛을 핑계 삼아 음료수를 마음껏 들이켰다. 내일 뱃살은 내일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