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때부터 어딘가 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4차원이라는 말도 자주 들었죠. 제 생각에 그런 말을 자주 듣게 된 이유 중에 '취향이 독특하다'는 것이 영향을 준 것 같은데, 특히 보통 여자애들과 다른 주제에 관심을 갖는 편이었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기질적으로도 감정의 폭이 좁은 편이었던 것 같은데, 감정을 드러내고 하소연하거나 징징대기 어려운 주변환경 탓에 더더욱 억압을 하는 쪽으로 진행된 것 같아요. 쌓이고 쌓여있던 긴장과 분노가 추리물, 공포, 스릴러, 범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 같고, 사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때까지는 상담, 심리치료보다도, 범죄심리에 관심이 더 많기도 했었죠. 공포, 스릴러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볼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이나 피해자의 입장에 깊이 정서적인 공감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죠. 아마도 정서적 감수성(타인의 감정을 공유하여 느끼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절대 이런 영화들은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이렇게 감정을 억압하며 자란 저는, 아무리 우울해서 매일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오열하면서도 낮이 되면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학교 수업도 열심히 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직업적 기능 유지가 가능했고, 감정을 억압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그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더 편한 길이라 생각했죠. 대부분의 성공, 성취, 목표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아마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러다 문제의식을 갖게 된 건, 심리치료에 대해 전공을 하며 배우게 되면서부터였어요. 그러면서, 사실은 감정을 억압하고 괴로워 죽겠는데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일을 해나가며 살아가느라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비난해왔는지, 그 덕에 스스로가 얼마나 위축되고 긴장되어 있는지를 깨달았고, 이렇게 살지 않는 방법이 있을지 궁금했어요.
물론 상담을 받거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공감해주다 보면 나약해지거나 나태해지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그게 나에게도 가능한 방법일까? 과연 내가 나를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온갖 의문들이 맴돌았지만, 그래도 시도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든 건, 심리치료를 오래 한 선배들에게서 보이는 따뜻하고 관대하며 타인을 돌보려는 마음과 태도가 미친 긍정적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 상담을 받을 때 상담선생님이 정서에 접촉하는 작업을 하려 시도할 때마다, 무언가 차단벽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선생님이 "어떤 것이 떠오르냐?"고 하면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데요?"라고 말하며 민망해하기를 수 차례 반복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답답하고 조금은 절망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혀 물어본 적이 있어요.
"선생님. 감정을 덜 억압하고 허용해주다보면
저도 언젠가는 긍정적인 감정을 더 잘 느끼게 될까요?
가끔 맛있는 걸 먹으러 갔을 때 발을 동동 구르며 행복해 어쩔 줄 모르는 친구들을 보면
그게 참 부럽더라고요."
선생님은 분명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말하셨지만, 솔직히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왜냐면 그 때까지 내가 온 평생을 다 돌이켜보고 하나하나 되돌아가며 살펴봐도, 내가 느꼈던 가장 강렬한 행복감이나 그것을 느낀 순간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어쩌면...'에 가깝습니다.
아직도 저는 개인에 따른 편차, 어쩌면 타고난 제한선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차분하고 고요하며 정적이거나 느린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강렬하게 솟구치는 감정보다는 잔잔하고 은은한 물결처럼 퍼지는 감정을 더 잘 느끼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은 아무래도 긍정적 감정을 느끼더라도 그 폭이 치솟는 형태는 아닐 테니까요. 저는 썩 차분하거나 느린 편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정적이고 억제적인 편이라는 점에서는 이쪽에 가깝지 않나 생각돼요.
그렇지만 이렇게 성향의 특성으로 인해 주로 느끼는 감정의 종류나 색채가 다르다 하더라도, 분명 감정을 덜 억압하려는 노력을 통해 더 많은 감정을 다채롭게 느낄 수 있다고, 이제는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마음챙김을 보다 깊게 접할 기회가 생겼고, 그 후로는 삶에 마음챙김을 자주 접목해가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좀 성질이 급한 편이라 길고 차분한 집중명상같은 건 잘못 해요. 솔직히 말하면 아예 안 합니다(!). 저의 한계는 (아직은) 15분 정도더라고요.
대신 마음챙김을 짧게 그러나 자주, 일상에 적용해보려 합니다.
특히 이럴 때는, 가능한 꼭 마음챙김을 해 보려 해요.
몸에서 나에게 익숙한 스트레스 반응이 올라올 때
머리속이 지나치게 복잡하여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고 느껴질 때
마음(가슴)이 답답하고 자꾸 한숨이 나올 때
알 수 없이 짜증이 솟구쳐서 애꿎은 가까운 이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게 될 때
잠을 자야 하는데 잡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고 자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게 될 때
마음이 허하고 불안하게 느껴질 때
어떤 상황에서 마음챙김을 하는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제 몸과 마음이 주는 소리에 아주 자주 귀를 기울이고, 그 순간을 잘 알아차리려 합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유가 있으면 있어서 불안하고, 할 일이 많으면 많아서 정신이 없어 짜증이 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싶은데 어색해서 이상한 말이 먼저 나와버려서 후회하고, 스스로가 못나게 느껴질 때는 한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고, 사람들을 대하는 자리에서는 늘 긴장되고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닐까?',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위축되기도 하는 등, 여전히 유약하고 불안정하고 부족한 사람이라 느낄 때가 많아요.
하지만 이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더 내가 그리고 타인이 함께 편안하고 행복하게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우선 나 자신에게 그 다음으로는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지향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큰 차이를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은 확신합니다. 왜냐면, 이미 내가 살아온 과정을 통해 내가 그러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