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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r 25. 2024

77세 어르신이 이렇게까지 한다고?

워드 능숙자를 넘어서


어르신들과 '내 인생 풀어쓰면 책 한 권'이라는 글쓰기 수업을 한다. 어느 곳에서 수업을 해도 정원 12명 중에서 많아야 두 분 정도만 워드를 다루신다. 나머지는 그냥 손글씨로 쓰신다. 


대놓고 티 내지는 않지만 그 두 분은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지난 시간에 '하나에 하나씩'을 강조했다. 한 문장, 한 문단, 전체 글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어야 가독성 좋은 글이 된다는 요지였다. 


수업이 끝나고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워드를 잘 다루는 77세 어르신이 '글쓰기에 대한 글'을 써봐도 되겠냐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주제까지 정하신 게 반가운 나는 당연히 되니까 메일로 꼭 보내달라 했다.


우리 반 유일한 워드 능숙자

다음 수업날 아침, 지하철에서 메일을 받았다. 읽자마자 걱정이 밀려온다. 


'하나에 하나씩'을 강조하면서 문단까지는 했는데 전체 글쓰기는 어려운 게 이렇게 티가 나는 건가 싶었다. 




서두는 '복지관에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하면 할수록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였다. 평범한 시작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오랫동안 책을 많이 읽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쓰기보다 읽기를 좋아해서 많이 읽었다는 것, 한참 읽을 때는 한 달에 몇 권까지도 읽어봤다는 것,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글쓰기에 대한 책을 또 샀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다는 것, 책을 사는 김에 평소에 관심 있던 다른 책들도 많이 샀다는 것 등으로 이어지다가 '다양한 독서보다 깊은 독서를 해야겠다'라고 마무리 한 글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스크린에 글 전체를 띄워놓고 같이 이야기를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일단 문단 사이에 엔터를 넣어 간격을 벌려 놓고 출력을 했다. 쉬는 시간에 출력물을 드리면서 살짝 말했다. 


"제가 문단별로 간격을 만들었어요. 이래 놓으면 그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더 잘 보이거든요. 지금은 쓰기와 읽기가 조금 섞였어요. 문단별로 쓰기인지, 읽기인지 확인해 보시겠어요?"


어르신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일단 알겠노라 하시고 안경을 고쳐 쓰셨다. 내 의도가 곡해되지 않길 바라는 10분이 짧게 흘러갔다. 




다음 수업이 진행될 동안 워드 어르신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좀 더 부드럽게 접근했어야 하나 싶어서 머리가 복잡해지는 차, 갑자기 그분이 본인 글을 띄워달라 하시더니 느릿느릿 말씀을 시작하셨다.  


"이렇게 널찍하게 해놓고 보니 시작은 잘 쓰고 싶다인데 끝은 잘 읽고 싶다로 해놨더라고요. 저번에 하신 그 '하나에 하나'가 진짜 쉽지 않다는 걸 이제야 알았고요. 제가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따로 출력해 주신 것도 고맙고요. 우리 수강생 여러분과 나누면 좋을 거 같아서 부끄럽지만 제가 먼저 공개합니다."



우리 반 분위기 메이커 83세 어르신이 한 마디를 더 보태셨다. 


"부끄럽긴 뭐 부끄러워요. 하나에 하나고 뭐고 저 분량을 채웠다는 거 자체가 대단하고만. 안 그랴요?"


'그람요, 나는 저만큼도 못 써요' 식의 웃음 섞인 동조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 바짝 긴장한 내 마음을 툭 내려놓았다.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어린 수강생들과 글쓰기 수업을 할 때는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없다. 애초에 공지를 했다. 


예쁘고 고운 말로 돌려 말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그러면 배우는 양이 줄어들 거고 결국 당신들 손해라고, 글 지적을 사람 지적으로 오해해서 혼자 끙끙대지 말라고, 그게 자신 없으면 그냥 혼자 쓰시는 게 낫다고 했다. 


'괜찮은 글'이라는 결과물을 빨리 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럭저럭 잘 통하는 방법이었다.



어르신 글쓰기는 굳이 빠른 결과물을 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글 하나가 나오기까지 쌓이는 시간에서 즐거움을 오래 누려야 한다. 


이번 시간에는 별로 못 썼지만 다음 시간에는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 그게 내 역할이다.  



'내 인생 풀어쓰면 책 한 권'의 목표가 끝내주는 책을 만들어 내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 동안 쓰는 양은 한계가 있으니 당연하다. 그러니 수업 제목만큼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세계이긴 하다. 





그 안에서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에 대한 신뢰감과 어제보다는 오늘이 조금 낫다는 뿌듯함 정도이다.


거기까지 가는 단단한 징검다리를 워드 어르신 덕에 하나 더 만들었다. 워드 어르신도 다음 주엔 더 나은 글을 써오시겠지. 이러니 내가 이 수업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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