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목숨 질기다는 거 다 거짓말
아빠는 건설회사 이사였다. 삼성건설 이사쯤 되면 좋을 텐데 지방 소도시 이름 없는 회사였다.
작은 회사는 직급이 후하다. 아빠는 마흔 초반에 이사님이 됐다.
이사님이 된 아빠는 야간 대학교에 들어갔고 건축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일하면서 논문 쓸 때, 비로소 아빠 생각이 났다. 중간 심사 빠꾸맞고 왔을 때 아빠한테 전화했다.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 안 난다. 내가 대차게 찡찡거린 것만 기억난다.
몇 년 후, 그 작은 회사 회장이 부도내고 먹튀 했다. 최이사님은 실업자가 됐다.
두어 달 후, 아빠는 인력사무소를 냈다. 롯데백화점 옆이라 <롯데인력사무소>였다. 험한 공사현장에서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일하던 사람에게 용역 사무소가 가능할까? 했는데 기어이 해냈다. 승용차 대신 1톤 트럭을 몰고 다니면서 자재를 운반했다.
교회나 학교 갈 때 가끔 아빠 트럭을 타고 갔다. 아빠는 멀리서 내려줄까?라고 했는데 나는 끝까지 타고 갔다. 아무도 안 타는 트럭을 타는 게 나름 하차감? 있다고 믿었다. 아빠는 나중에야 말했다.
속이 없는 건지,
자존감이 진짜 높은 건지
구분이 안 되더라?
인력사무소를 접은 뒤에 아빠는 구두를 닦아도 되겠냐고, 아빠는 괜찮은데 니가 창피하면 안 하겠다면서 내게 물었다. 우리 집 앞에 법원이 있었는데 그 입구에서 하는 일이었다.
건강한데 집에서 노는 사람이 더 창피한 거 아니냐고 대답했다. 아빠는 개운한 얼굴이 됐다.
흔히 말하는 소득빙하기 10년(55세부터 65세까지) 보다 더 긴 시간을 아빠는 인력사무소와 구두닦기로 채웠다. 지나고 보니 뭐로 건너든, 건너기만 하면 대단한 시간이다.
건축사 자격증은 생각보다 파워풀했다. 어느 사무실에서 아빠 자격증을 쓰는 대신 월급이 나왔다. 그게 60 후반일이다.
그 일은 또 일을 불러왔다. 70대 중반에 월 200이 꼬박꼬박 나오는 건설현장 사무직 직원이 됐다. 하루종일 문서작업을 했다.
독수리 타법을 간신히 벗어난 수준이었지만 철저한 마감과 오차 없는 문서로 다 커버됐다.
일흔일곱으로 돌아가시기 3주 전까지 출근했다. 아빠 소천 소식에 회사 사람들도 황망해했다. 그렇게 멀쩡해 보였던 사람이 이렇게 빨리 갈 수 있느냐고.
사람 목숨 질기다는 말은 아빠만 피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