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만 하는, 그래도 시작이라도 하는!
자기소개서 3번쯤의 문항이자 소개팅 단골 출연 멘트로 수도 없이 들어본 질문이 있다.
"취미가 뭐예요?"
내 인생에서 ‘취미’에 대해 가장 깊게 고민해 본 시기는 민망하지만 취준생 때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20개쯤 되는 기업에 자기소개서를 냈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내 취미를 물었었다. 단순히 취미를 적으라고 한 기업도 있었고 5년 이상 지속해 온 취미를 적고 그로부터 본인이 얻은 것들을 서술하라며 지난 5년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게 한 기업도 있었다.
취업용 자기소개서는 어떻게든 나를 삶에 의욕이 넘치고 대학 4년간 그게 뭐든 간에 차근차근 준비해온 사람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일종의 포장 대회이므로 나는 아빠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골프를 취미로 적기도 했었고(팀 스포츠를 선호하는 나는 가만히 채만 휘두르는 골프가 그리도 지루할 수가 없어 3개월짜리 강습권을 단 하루 만에 환불한 후 그 뒤로는 최근까지 단 한 번도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왠지 기업에서 좋게 볼 것 같아 아무의 취미도 아닐 것 같은 ‘정리하기’를 취미라고 적어낸 적도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이렇게 거짓 취미를 적어낸 기업은 신기하게도 단 한 군데에서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기업 인사팀 직원분들도 이런 거짓말에는 도가 트긴 했나 보다.
자기소개서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취미를 적었던 이유는 예상하겠지만 딱 하나다. 취미라고 할 만 게 없어서. 내 또래 여자 친구들의 취미는 보통 맛집 탐방, 미드 보기, 필라테스 등으로 압축된다. 시간 날 때마다 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게 그들이 말하는 취미의 공통점이다. 나에게 그런 감정을 줬던 대상이 뭐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잠시 헬스가 취미였던 적이 있던 것 같다.
지난 몇 년 간 다녔던 내 첫 번째 직장의 지하 1층에는 헬스장이 있어서 점심시간을 식사에 쓸 수도, 운동에 쓸 수 있었다. 입사 1~2년 차에는 점심 헬스반에 등록해 식사도 거르고 매일 30분이라도 운동을 해왔는데, 약속 때문에 점심 운동을 못 하면 몸이 좀 쑤시는 느낌을 받았던 적도 있으니 그때의 나는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헬스요!’라고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헬스장이 문을 닫았던 2019년 2월부터 책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야심 차게 등록한 동네 헬스장의 VVIP가 되어준 내 모습을 돌아볼 때 헬스가 정말 좋아서 헬스장에 향했다기보단 점심 식사 후 뜨는 시간이 아까워 헬스를 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남들에게 취미라고 할 만한 걸 가지려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처럼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실력이라도 꾸준함과 애정을 갖고 그 분야를 진득하니 해오는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프로 시작러', 즉 무언가를 시작해 보는 것 자체를 즐기는 나는 슬프게도 시작만 거창했지 끝장을 본 분야가 단 하나도 없다.
몸은 한 개뿐인데 그 많은 곳에 어떻게 가입했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대학 때 댄스, 치어리딩, 라켓볼, 방송국, 영화 제작, 마케팅, 농구, 코딩.. 10개에 육박하는 동아리에 소속되었었는데 한 학기 이상 적을 둔 곳은 겨우 두 곳뿐이다. 그마저도 지금까지 OB로 활동하고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어디 동아리뿐이랴.
재미있어 보여서 시작한 사외 스터디도 독서 클럽, 영어 회화 스터디, 잡지 편집 모임..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지만 그중 독서 모임만 두 시즌을 겨우 지속했고 나머지는 모두 갖가지 이유로 중도 하차했다. 그 당시 친구들은 ‘와.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하나도 아니고 학회 세 개를 동시에 해?’라며 놀라워했었는데 그 이면에는 세 개를 동시에 한다는 의미는 사실 그중 어느 하나도 정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여태까지는 ‘유종의 미를 거두다’라는 말이 너무 익숙하고 최소 한 분야를 몇 년 이상 해와야 비로소 인정해 주는 분위기의 사회에서 살아온 탓인지 프로 발전러인 나를 자신 있게 드러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오히려 이곳저곳 뻗쳐 있는 내 관심을 이제는 좀 접고 가장 관심이 가는 한 분야에만 집중해 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작가와는 거리가 먼 내가 브런지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한 것부터 시작해 전에는 관심도 없던 부동산 투자나 실내 인테리어 잘 하는 팁을 알려주는 강좌를 결제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난 진짜 찐프로 시작러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내 성향을 대변하는 에밀리 와프닉의 저서 ‘모든 것이 되는 법’은 끈기가 없다고 비난받지만 사실은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다재다능형 인간(multipotentialite)’이라고 칭하며 ‘새로운 것을 쉽게 시작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준다.
글을 쓰게 된 덕분에 취미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며 찾아본 사전에서는 취미를 ‘마음에 끌려 일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흥미’, ‘전문이나 본업은 아니나 재미로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보다 가볍게 정의하고 있다. 즉, 내 고집이나 에밀리의 저서만이 아닌 사전에 기반해서도 ‘새로운 것 시작하기’는 당당하게 하나의 취미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대상에 쉽게 흥미를 느끼고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프로 시작러들이여, 이제부터 나와 함께 취미가 무엇이냐는 혹자의 질문에 ‘어서 와, 이런 취미는 처음이지?’라는 태도로 당당하게 대답해보는 건 어떨까.
본문에 소개한 에밀리 와프닉의 저서에 관심을 가지실 독자분들을 위해 온라인 판매처 주소를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