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대리 Jan 02. 2023

안녕하세요, 프로 시작러입니다.

시작만 하는, 그래도 시작이라도 하는!

자기소개서 3번쯤의 문항이자 소개팅 단골 출연 멘트로 수도 없이 들어본 질문이 있다. 


"취미가 뭐예요?"


내 인생에서 ‘취미’에 대해 가장 깊게 고민해 본 시기는 민망하지만 취준생 때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20개쯤 되는 기업에 자기소개서를 냈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내 취미를 물었었다. 단순히 취미를 적으라고 한 기업도 있었고 5년 이상 지속해 온 취미를 적고 그로부터 본인이 얻은 것들을 서술하라며 지난 5년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게 한 기업도 있었다.


취업용 자기소개서는 어떻게든 나를 삶에 의욕이 넘치고 대학 4년간 그게 뭐든 간에 차근차근 준비해온 사람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일종의 포장 대회이므로 나는 아빠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골프를 취미로 적기도 했었고(팀 스포츠를 선호하는 나는 가만히 채만 휘두르는 골프가 그리도 지루할 수가 없어 3개월짜리 강습권을 단 하루 만에 환불한 후 그 뒤로는 최근까지 단 한 번도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왠지 기업에서 좋게 볼 것 같아 아무의 취미도 아닐 것 같은 ‘정리하기’를 취미라고 적어낸 적도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이렇게 거짓 취미를 적어낸 기업은 신기하게도 단 한 군데에서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기업 인사팀 직원분들도 이런 거짓말에는 도가 트긴 했나 보다.




자기소개서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취미를 적었던 이유는 예상하겠지만 딱 하나다. 취미라고 할 만 게 없어서. 내 또래 여자 친구들의 취미는 보통 맛집 탐방, 미드 보기, 필라테스 등으로 압축된다. 시간 날 때마다 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게 그들이 말하는 취미의 공통점이다. 나에게 그런 감정을 줬던 대상이 뭐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잠시 헬스가 취미였던 적이 있던 것 같다.

 

지난 몇 년 간 다녔던 내 첫 번째 직장의 지하 1층에는 헬스장이 있어서 점심시간을 식사에 쓸 수도, 운동에 쓸 수 있었다. 입사 1~2년 차에는 점심 헬스반에 등록해 식사도 거르고 매일 30분이라도 운동을 해왔는데, 약속 때문에 점심 운동을 못 하면 몸이 좀 쑤시는 느낌을 받았던 적도 있으니 그때의 나는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헬스요!’라고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헬스장이 문을 닫았던 2019년 2월부터 책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야심 차게 등록한 동네 헬스장의 VVIP가 되어준 내 모습을 돌아볼 때 헬스가 정말 좋아서 헬스장에 향했다기보단 점심 식사 후 뜨는 시간이 아까워 헬스를 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남들에게 취미라고 할 만한 걸 가지려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처럼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실력이라도 꾸준함과 애정을 갖고 그 분야를 진득하니 해오는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프로 시작러', 즉 무언가를 시작해 보는 것 자체를 즐기는 나는 슬프게도 시작만 거창했지 끝장을 본 분야가 단 하나도 없다. 


몸은 한 개뿐인데 그 많은 곳에 어떻게 가입했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대학 때 댄스, 치어리딩, 라켓볼, 방송국, 영화 제작, 마케팅, 농구, 코딩.. 10개에 육박하는 동아리에 소속되었었는데 한 학기 이상 적을 둔 곳은 겨우 두 곳뿐이다. 그마저도 지금까지 OB로 활동하고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어디 동아리뿐이랴. 


재미있어 보여서 시작한 사외 스터디도 독서 클럽, 영어 회화 스터디, 잡지 편집 모임..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지만 그중 독서 모임만 두 시즌을 겨우 지속했고 나머지는 모두 갖가지 이유로 중도 하차했다. 그 당시 친구들은 ‘와.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하나도 아니고 학회 세 개를 동시에 해?’라며 놀라워했었는데 그 이면에는 세 개를 동시에 한다는 의미는 사실 그중 어느 하나도 정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여태까지는 ‘유종의 미를 거두다’라는 말이 너무 익숙하고 최소 한 분야를 몇 년 이상 해와야 비로소 인정해 주는 분위기의 사회에서 살아온 탓인지 프로 발전러인 나를 자신 있게 드러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오히려 이곳저곳 뻗쳐 있는 내 관심을 이제는 좀 접고 가장 관심이 가는 한 분야에만 집중해 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작가와는 거리가 먼 내가 브런지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한 것부터 시작해 전에는 관심도 없던 부동산 투자나 실내 인테리어 잘 하는 팁을 알려주는 강좌를 결제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난 진짜 찐프로 시작러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내 성향을 대변하는 에밀리 와프닉의 저서 ‘모든 것이 되는 법’은 끈기가 없다고 비난받지만 사실은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다재다능형 인간(multipotentialite)’이라고 칭하며 ‘새로운 것을 쉽게 시작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준다.



 

글을 쓰게 된 덕분에 취미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며 찾아본 사전에서는 취미를 ‘마음에 끌려 일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흥미’, ‘전문이나 본업은 아니나 재미로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보다 가볍게 정의하고 있다. 즉, 내 고집이나 에밀리의 저서만이 아닌 사전에 기반해서도 ‘새로운 것 시작하기’는 당당하게 하나의 취미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대상에 쉽게 흥미를 느끼고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프로 시작러들이여, 이제부터 나와 함께 취미가 무엇이냐는 혹자의 질문에 ‘어서 와, 이런 취미는 처음이지?’라는 태도로 당당하게 대답해보는 건 어떨까. 



본문에 소개한 에밀리 와프닉의 저서에 관심을 가지실 독자분들을 위해 온라인 판매처 주소를 첨부한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574450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