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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의 딸 Sep 12. 2019

13. "May I have your name?"

나를 커졌다 작아졌다하게 만드는, 영어

밴쿠버에서는 라이센스를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게나 연어를 잡을 수 있는 권한을 준다. 대신 너무 작은 게를 잡으면 놓아 주어야 한다.  또 집에 가져갈 수 있는 갯수제한이 있다.


    대학입시를 끝마치고 제일 먼저 등록한 곳은 서울 종로의 한 외국어학원이었다. 1990년대. 그 때는 배낭여행을 떠나려는 대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외국 브랜드가 많이 들어올 때였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쇼핑(지금은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는 맥도널드가 있었고, 그곳에는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는 청춘남녀들이 있었다. 1997년말 IMF 구제금융을 받기 전까지, 내가 기억하는 한국은 ‘외국’ ‘글로벌’이라는 화두에 가슴벅차했던 것 같다. 시험으로서의 외국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여행을 떠나 현지인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이라는 기회를 통해 외국으로 나가려는 학생들도 많았다.

 

    내가 좋아했던 과목은 외국어였다. ‘리더스 뱅크’같은 참고서의 영어 지문을 읽는 것도 좋았고, 단어장을 만들어 영어단어를 줄줄 쓰면서 손으로, 입으로 외우기도 했다. 대학도 영어영문학과로 갔다. 발음이 좋진 않았지만 통한다고 생각했다. 종로 회화학원을 다니면서 원어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캐나다로 올 때, ‘내가 네이티브 스피커는 아니지만 사는 데 별 지장은 없다’고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캐셔와 서버를 하면서, 가장 처음에 당혹스러웠던 것은 ‘전화응대’였다. 한국에서라면 “안녕하세요. OOO 레스토랑입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하고 그 다음 주문내용에 맞춰 오더를 넣고 나온 음식들을 포장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어는 달랐다.

 

    사람 입을 보고, 표정을 보면서 알아듣는 것과, 온전히 수화기 속 사람의 ‘말’로 소통하는 것은 달랐다. 한 마디로 눈치로 알아채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들은 ‘알래스카롤’이라고 하지 않았다. ‘알.레~에~스카’라고 했다. ‘망고’가 아니다 ‘맹~고’였다. 일본어 음식명칭이 캐나다 사람 입을 통해 나오면, 새로운 형태의 발음이 되었다. 치킨테리롤은 ‘로~올’인지, 아니면 ‘동(돈부리)’인지 끝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알레르기(엘러지)있는 사람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 안에 뭐가 들어가나요? 나는 견과류(넛)가 들어가면 안되는데. 스프에는 물고기(가다랑어포)가 들어가나요? 베지테리언이 먹을 수 있는 롤은 뭐가 있죠? 몇 피스로 나오죠? 

 

    포스 단말기를 보면서, 손으로 메뉴를 찍으면서 들어야 했다. 귀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손으로는 오더를 넣어야 했다. 헤매면서 하나를 찍고 있으면, 전화기 속 상대방은 속사포처럼 자기 말을 이어 나갔다. “저, 저 죄송한데 다시 한 번만 말해주세요.” 계속 못 알아들으니, 남자는 화를 내며 말을 했다. “어휴, 너 말고 다른 사람 좀 바꿔.” “저 밖에 지금 없는데요.” “(끊는 소리)” 손님 하나를 그렇게 내가 떠나보냈다. 

 

    주문을 다 받은 후에는 손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확인해야 했다. 다른 지역에 비슷한 이름의 식당이 있어서, 주문을 해놓고 안 찾아가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What is your name?” “What is your phone number?” 몇 번을 그렇게 받았을까. 다른 직원이 나를 살짝 불렀다. “제가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보면 영어로는 예의가 아니더라고요. ‘May I have your name?’이라고 하세요.” 고마운 충고였다. 나는 경어를 쓸 처지가 아니었다. 예절을 따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소통만으로도 힘들었다. 손이 덜덜덜 떨리고 긴장되서, 포장용 비닐 여러 겹을 떨리는 손으로 떼지 못한 적도 있다. 출근만 하려고 하면, 전화 받을 걱정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현지인의 영어를 들어보니, 예의바른 사람일수록 말이 ‘길었다.’ 짧게 지시만 내려줘도 되는데. 자기네들끼리는 부드러운 표현, 존칭어가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한국어로 한 두 마디만 던지는 것만 들어도, 뉘앙스나 상대방의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가. “물 좀 갖다 주세요”라고 바로 말하지 않았다. “If you have any chance...”라고 앞에 붙였다. “계산서 갖다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If you are ready...”라고 앞에 붙였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은 이민자들이 초반에 누구나 갖는 부분이다. 한국사람으로서 어려웠던 것 중에 하나는 부정문으로 물어봤을 때다. “~~하지 않았지?”라고 물으면, 한국어로는 “어, 안했어”인데 그런 의미에서 “YES”라고 대답했다가는 상대방이 헷갈려한다. “너 OOO파티 안 갈거지?” 이런 질문도 그렇다. 머릿속으로 한국말로 해석했다가 대답하면,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이 간다는 건지, 안 간다는 건지 캐나다인은 헷갈려하는 것이다. 

 

    영문법 속에서만 봤던 단어를 실제로 들으면서, ‘아 그럴 때 쓰는구나’ 느꼈던 적도 있다. 맛있는 음식들이 속속 도착하자, 백인 할머니는 행복한 표정으로 “It is like a feast!!” 하며 동조해달라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눈이 마주쳤는데 내 맘속은 ‘피스트? 피스트?’ 하고 외치고 있었다. 아!!! 단어장에 썼던 축제, 성찬.. 그 feast? 하고 나니 알아들었다. 


     유머러스한 캐나다인들은 내게 농담을 하고, 반응을 기다린다. 문제는 알아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알아들었지만 내가 적절하게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할 때다. 영어로 길게 이야기하는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한 엄마는 “How are you?”라고 상대방이 물어보면, 매번 “아임 굿. 파인” 하는 것도 똑같아서 민망스럽다고 한다. 그래서 “헬로우”하고 도망간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성격이 활달했던 사람도 대화가 계속 이어지지 않는 학부모들과의 만남이 두려워, 차 안에 숨어서 아이가 학교밖에 나오기만 기다릴 때도 있다. 나는 이번 주 새학기 학부모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반드시 가야할 것도 아니었고, 아직 어색한 사이 속에서 피자를 먹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두려웠다.  


     나도 영어에 대한 내 자부심과 기대치를 놓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상대방이 말하는데 내가 영어로 문법정리하고 있다고 대답을 안 하면, 더 오해받을 것 같았다. 농담이든 이야기든 뭔가 말했는데, 상대방이 말 없이 그냥 웃고만 있으면 이상하지 않을까. 그래서 액션을 섞기로 했다. 

 

    한 단골 손님이 결혼을 앞둔 딸과 함께 식당을 찾았다. 근황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는지, 딸의 웨딩 준비사진을 보여주면서 “예쁘지 않느냐”고 이야기를 했다. 딸은 실물이 정말 미녀였다. 준비 사진을 보여주며 행복해 하면서 나를 보길래, “축하해요. 이 사진도 예쁘지만 따님 실물이 정말 예쁘네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영작’이 잘 전달이 안 됐나 보다. ‘음?’하는 표정이 나오길래, 1-2초 당황하다 아이폰을 잡고 있는 손님에게 말했다. “쉬 이즈 베리 뷰티플. 픽쳐, 스티븐 잡스 우~~~”하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제스추어를 했다. 갑자기 손님은 빵 터졌다. 내가 칭찬하고 싶어했던 내용은 알아 듣는 것 같았다.

 

    영어를 잘 말하지 못해 가슴 속이 터지도록 답답하다는 둘째. 어제는 기분 좋게 학교에서 돌아왔다. “내가 중국인인줄 알고 한 친구가 나한테 중국말을 쓰더라고.” 그래서? “내가 영어로 말해줬지. 나 중국사람 아니라고. 그러더니 다른 친구한테 가더라고.” 뭐라고 했는데? 둘째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이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나보다.

 

    “Me not China!!” 그래, 그 친구도 무슨 뜻인지 알았겠지. 


     영어가 안 되는 날은 우울하고, 영어가 한국어처럼 잘 들리고, 입에서 잘 나오는 날은 기분이 좋다. 다들 비슷하다. 영어를 그렇게 오래 우리는 배웠는데, 아직도 왜 이리 심장이 벌렁벌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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