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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의 딸 Sep 16. 2019

14. Who am I?

초등학생에게 자꾸 "너는 누구냐"고 묻는 캐나다 학교

노스 밴쿠버의 Deep Cove. 대단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정박해 있는 요트를 바라보며 차 한잔 마시고, 아이들이 썰물에 작은 게도 잡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곳.


    초등학교 6학년(한국나이로 5학년)인 딸이 고심하다가 숙제를 내밀었다. 영어해석이 안 되서 나에게 물어보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에 대해서 작문으로 써오라는데, 뭐라고 써야하지? 너무 좋은 점만 쓰면 잘난척 하는 애라고 생각할 것 같고, 그렇다고 단점만 쓰기도 그렇고..."하면서 내 얼굴을 쳐다 보았다.


    제목은 "Who am I?" 였다. 말 그대로 나는 누구인가. 몇 해 전, 동남아시아에서 국제학교를 보내는 한 어머니가 한국으로 아이를 데려오면서 "중학교 1학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탐구하고, 그런 것만 배우고 있어서 한국 아이들에 비해 너무 뒤쳐질까봐 두려워서 일단 데려왔어요"라고 말했었다. 한국에서는 수학, 과학을 엄청난 속도로 배우고, 암기로 외우고 있는데 "나는 누구인가"를 한 학기동안 탐구하는 학교가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서구에 대해 동경하면서도, 우리는 완전히 서구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을 두려워한다. 한국식으로 키우면서 글로벌 인재로 영어는 유창하게 하는 '미션 임파서블'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제는 여러가지 항목으로 이뤄져 있었다. "당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나 낱말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좋은가요?" "당신을 화가 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반 친구로 삼고 싶은 유명인은 누구입니까?"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요?"


    아이 자신보다도, 부모인 내가 아이에 대해 더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가 뭘 좋아했지? 어떤 성격이지? 선생님한테 아이 성격이 어떻다고 말해야 할까? 아이는 어떤 걸 할 때 행복해하지? 얘가 화낼 때는 어떤 상황이었더라? 찬찬히 아이 얼굴을 보면서 떠올렸다.


    딸은 경쟁심이 강한 아이였다. 하지 못하는 일을 두고, 속상해했다. 이루지 못하면, 부모 앞에서도 자존심이 있었는지 말을 다 하지 않았다. 체육부장 투표에서 떨어진 날,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이가 스스로 입후보했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1주일간 감기처럼 몸살을 앓았다. 아이는 자신을 뽑아주는 친구들이 많을 것이라 기대했었던 것 같다. 일종의 실패였다.


    반면 엄마인 나는 만만디였다. 나는 공부를 엄청 잘해본 적도 반장, 부반장이 될 '생각' 조차도 해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아이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치원에서 '오즈의 마법자'에서 도로시 주인공 역을 따지 못해 우는 아이 앞에서 "그 까짓게 뭐가 중요해. 사자나 양철나무꾼, 나무도 좋지 않니?"라며 아이를 위로하고자 했던 '야망이 없는' 엄마였다.


    아이 숙제 한 장을 놓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했었다. 왜 이 나라는 자꾸 5,6학년 때부터 자기 탐구를 시키는 걸까. 내가 뭘 할 때 기분이 좋고, 뭘하면 기분이 나쁘고. 무엇이 하고 싶고, 어떻게 살고 싶고. 무엇이 갖고 싶고, 어떻게 인정받았을 때 기분좋은지. 예전에는 "이상한 서구식 공부네"라고 했겠지만, 작년 심한 '중년 앓이'를 했던 나로서는 "아, 이게 필요하지!" 하며 이해가 갔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1등을 해본 적은 당연히 없다.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하니까" 열심히 살았다. 장녀도 아닌데 이상한 '장녀 컴플렉스'가 있었다. '나라도 잘해야지'라는 마음이 나를 지배했던 것 같다. 그렇게 대학을 가고, 아주 특출나지는 않지만 열심히 살았다. 토익도 공부하고. 그런데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하다못해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못했다. 진로교육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끄적거려본 이상한 로맨스 소설을 아버지한테 들켰을 때는, 그냥 부끄러웠다. 역사학과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거기는 '밥 못 벌어먹고 사는 과'라는 소리만 들었다. 부모님이 고등학교 1학년 부모면담 시간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얘는 인 서울을 못 갈 것 같다"고만 했다.


    어떻게 저떻게 또 대학을 갔는데, 자꾸 남의 눈만 의식했다. 당시 외국계 기업에 취업이 잘 된다고 해서, 그저 영어영문학과를 진학했고, 이후에 경제학과가 취업이 잘 된다고 해서 또 과목을 들으면서 취업을 준비했다. 나에게는 남의 눈만이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어쩌다 엄마 친구가 말하는 "OO이는 그래도 학교랑 잘 갔네. 취업 잘 되겠네"라는 말이 나를 입증해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들의 칭찬이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나는 한 때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로 일했었다. 신문과 미디어에 나지 않은 슬픈 죽음이 참 많다. 학교폭력으로 시달리던 아이는 상대방의 모멸적인 말 한 마디에 뇌출혈로 죽었다. 아무도 그 소녀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하거나 잔인하게 죽지 않으면 신문에 나지 않는 사연도 많다. 학업에 대한 고민으로, 여자친구에 대한 고민으로, 부모님에 대한 고민으로 야산에서 죽음을 택한 아이들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기자들의 '보고'로 끝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저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다. 그래서 공부하라는 말도 안하고, 한글을 떼건, 떼지 않건 무신경한 엄마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내 뱃속으로 낳고, 기른 아이들이 '어떤 때' '어느 순간에' 행복한지 알지는 못 했던 것 같다. 나처럼 무덤덤하게, '평범하게 살자'가 목표인 사람도 있겠지만, 내 딸처럼 인정받고 싶고, 최고가 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좌절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너무나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에서의 삶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캐나다까지 와서 헤매고 있는 40대의 나를 바라보자니.. 이들의 교육방식에서 한 가지를 배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 우리는 조금 무심했구나.


    얼마 전, 한 40대 후반 부부를 우연히 만났다. 한국에서 교사로 일했다는 남편, 그리고 중산층이었던 부부였다. 한국에서도 교사라면 참 좋은 직업인데. 왜 이 40대 부부가 캐나다로 건너와 영주권을 받으며 교사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해 묻기엔 사생활을 침범할 것 같아서, 질문을 서로 멈췄다.


     조금 더 일찍 물어보자. 각자에게. "당신은 어떨 때 행복한가요. 어떨 때 화가 나나요. 무슨 삶을 꿈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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