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희의 딸 Jan 22. 2020

22. 나이든 남자는 Sir이 아니다

아주머니와 아줌마 중에 뭐가 더 듣기 좋냐고?

밴쿠버 미니 올라프. 비가 잦은 밴쿠버 겨울날씨에 한 번씩 폭설이 내릴 때도 있다.

    캐나다는 백인 유럽의 후손들이 많다. 영국계, 프랑스계, 그리스, 이탈리아, 동유럽에서 온 이민자들도 많다. 이제는 러시아사람들이 하는 영어발음도 좀 구분해 낼 수 있다. 최근 20여년간 인도, 중국, 아시아계 이민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백인들의 숫자는 많다.


    내가 일하는 식당은 백인 노인 손님들이 많은 지역이다. 노부부가 와서 식사를 하거나, 노인 1인 가구에서 조금씩 장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영어 공부를 '문법책'으로 주로 했던 나는, Sir(써)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를 존칭해 불러주는 단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Sir은 좋은 의미인 줄 알았다. 갑자기 영수증에 싸인을 받아야 하거나 할 경우, "Sir"라고 덧붙일 때가 있었다. 높여주는 의미니까, 저 사람도 좋아하겠지 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내가 소비자로서 푸드코트에서 디저트를 주문할 때였다. 20대 초반인 여자 점원은 생글생글하게 웃으며 "Ma'am(맴)"이라고 나를 불렀다. 응? 그래 나 나이든 여자 맞지..


    검색을 해보니, 성인 남성이나 여성 고객에게 Sir이나 Ma'am을 사용하는 것은 정중한 표현이라고 한다. 아마 그 점원도 나를 부르기 위해 그렇게 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늙어가는 사람한테 꼭 그 표현을 쓰니,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친정아버지는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 받는 기분이 묘하다고 했다. 그냥 서있을 뿐인데, 젊은이들이 자꾸 자리를 양보해주려고 했다고 한다. "나이대접 받으려고 지하철 앞에 서있는 것도 아닌데, 늙은 사람 취급까지 받으니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드는 생각이 처량함이다. 내가 다 늙었구나, 그렇게 흰 머리가 많나?! 그저 남들 눈에는 70대 노인이라고 '규정' 지어질 아버지도 그게 싫었나 보다.


    미혼인 50대 초반 남자 상사가 내게 질문했다. 당시 아기 엄마이던 내게 "누가 길에서 부를 때 아주머니랑 아줌마랑 어감이 달라요? 뭐가 더 나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되물었다. "길에서 길 물어볼 때, 그냥 '저기요'라고 하면 안 될까요. 꼭 나이 가늠해서 아줌마, 아주머니, 애기엄마, 아가씨 꼭 불러야 하나요. 그냥 저기요 해주세요."


    이제 내가 40대 들어서니, 정신이 번뜩 든다. 그 동안 젊음이 무기인 줄 몰랐구나. 얼굴을 씻는데 우리 엄마 얼굴이, 거울에 보인다. 애들도 외할머니가 캐나다 온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단다. 내 옆모습 때문에...


    50대 남자부장이 '캐주얼 데이'에 청바지를 입고 왔었다. 뒤에서 사람들이 흉보듯이 이야기했다. "나이 들면 긴머리, 청바지 이런 거 정말 안 어울리는데....뭔가 어색하지 않냐? 청바지와 나이 든 사람은...?"

    몇일 전, 딸 청바지를 사주러 가는 날. 옷장에서 허겁지겁 바지를 꺼내 입었는데 7~8년 전쯤 사서 계속 입은, 빛 바랜 청바지였다. 40대에 청바지를 사려고 한 게 아니라, 옷을 잘 안사다 보니까 10년 전 입던 옷을 늙은 내가 입고 있었다.


    화장도 그렇다. 20대, 30대에는 내가 젊은가, 안 젊은가 관심도 없었다. 그 때는 젊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화장도 '너무 아파보여서 사람들이 못 알아볼까봐' 직업용으로 하게 된다. 간단하게 쓱싹쓱싹.

어쩌다 내린 밴쿠버의 폭설. 따뜻한 날씨로 평소 노하우가 없었던 밴쿠버 공무원들이 몇해 전 크게 고생을 했다고 한다. 올해 폭설에는 제설차가 재빠르게 움직여 큰 피해가 없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한다. 학교 안 가서 좋잖아, 돈 벌어서 좋잖아, 잔소리 안들어서 좋잖아. 나도 그런줄 알았다고. 그런데 어른의 어깨가 더 무거워. 자꾸 크고 싶다고 하지마.. 나는 더 할머니가 될테니까. 지금보다 얼굴에 반점이 더 많아지고, 배는 축 처지고, 그리고 닫히는 인생 가능성에 마음도 더 작아질테고...


    "마음은 아직도 그 때랑 큰 차이가 없는데, 어느 날 내가 늙은이가 되어 있었어." 1927년생, 아직도 살아있는 내 외할머니가 여러 번 하시던 말씀이다. 이제 조금 그 마음이 이해간다. 겉으로는 멋있는 어른인척 하고 있지만, 여전히 욕망과 욕심과 유치한 생각에 범벅이 되어 있다. 내 마음을 누가 읽을까 두려울 정도다. 내 겉 모습의 노화와 내 마음의 속도가 발이 맞춰지지가 않는다.


    "Ma'am"이 내 귀에 썩 좋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 역시 식당에서 만나는 '나이 든' 고객들에게 "Sir"이라고 부르던 것을 그만 뒀다. 뉘앙스는 모르겠지만, 그러기로 했다. 아주머니든, 아줌마든, 아저씨든 할아버지든. 나이를 꼭 가늠해서 호칭을 손님에게까지 부를 필요는 없다고 그냥 결정했다.


    그리고 이름을 외워지는대로 부른다. "리처드 안녕" "조쉬, 평소처럼 간장이랑 젓가락은 안 넣어도 돼지?(환경보호자여서 비닐을 제일 싫어한다)" "샌디, 오늘 머플러 이쁘네"


    그들의 젊은 날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오늘 모습이 칭찬할만하면, 비교하지 않고 말한다. 젊어보이는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이뻤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늘 정말 예쁘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21. 식빵까페,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