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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Feb 10. 2024

비탄에 젖은 아르주나.

『바가바드기타』제1 장, 내면의 노래

 아침 일찍 성당을 찾았다. 모처럼 오전 평일 미사를 드렸. 요 며칠 은근하게 밀려오는 불확실한 현실로 인하여 기분이 울적했다. 조석으로 성무일도를 바치고 묵주기도와 묵상을 바쳐도 안갯속에 닫힌 듯 막막했다. 누가 괴롭힌 것도 아니거늘, 가슴 한복판에 무거운 바위가 얹혀있는 기분이다. 


 마음이 중심에 지 않았으니 거짓 경보음에 속는가 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감정임을 알면서도 헤맨다.  땅에 엎어진 자, 일어설 곳은 땅이라 했다. 그곳은 영혼이 머무는 내면이며 옴파로스다.  늘 빛과 어둠의 대결이 치열한 곳이자, 희, 노, 애,  모여 뒤엉켜 있는 곳이. 간혹 거짓 평화가 도래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하오니 주여 참평화를 허락하소서.


 바가바드기타1장은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전쟁으로 비유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을 치르는 주역은 아르주나 왕자. 물론 실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우리 내면에 벌어지는 선악의 갈등과 혼란을 전쟁으로 비유한 것뿐이다.


 전쟁의 연유는 인도의 고전 마하바라타에 나와 있지만 굳이 전후 맥락을 알 필요는 없다. 아무튼 쿠루족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사촌지간 두료다라와 판두의 아들 사이에서 벌어진 골육상쟁이다.     


 1장의 시작은 이렇다. 앞 못 보는 드라타라슈트라 왕이 산자야에게 묻는다.


  산자야여, 내 아들들과 판두의 아들들이 정의와 진리의 들판인 쿠루 들판에서 서로 대적하여 싸우려고 모였다는데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왕의 물음에 투시력을 지닌 신하 산자야현장을 생중계하듯 답한다. 이렇듯바가바드기타는 산자야가 드라타라슈트라 왕에게 진행 상황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산자야이기에 바르게 볼 수 있다. 감정이나 입장이 한쪽에 치우치면 현상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 법이니, 어떤 문제 상황에서 한발 벗어나 바라볼 일이다. 불현듯 장흥 어느 폐교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죄는 성급함과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돌이켜보니 성급함을 못 참았다가 후회했던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뭐든 경계에 자리할 때 사물이 제대로 인식되나 보다. 산자야는 경계에 서있는 자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산자야가 드라타라슈트라에게  말한다.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었고, 용맹을 상징하는 원숭이 신 하누만이 그려진 깃발을 날리며 전차 위에 서 있던 아르주나가 적진을 향해 활을 쏘려고 하다가 크리슈나에게 이렇게 말했다.”라고.


 비슈누 신의 화신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마부로 참전하고 있다. 신께서 인간을 위해서 말을 모는 마부가 된 것이다. 크리슈나는 굴림하지 않는 신, 기꺼이 낮은 자리에 임하는 신이다.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를 구분하는 잣대는 애매하다. 거대하고 휘경 찬란한 신을 모시는 종교는 사이비거나 저급한 종교다. 흔히 가짜일수록 우상화에 집중한다. 예수님은 태어난 곳이 마구간이었고, 마지막 자리는 처참한 십자가였다. 마찬가지로 크리슈나 신 역시나 낮은 자리 마부가 되어 영적인 전쟁터에 서 있다.    

  

 전쟁의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아르주나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그는 자신의 마부 크리슈나께 하소연한다.


 오 크리슈나여! 싸우려고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가족과 친족들입니다. 이것을 보니 맥이 빠지고 입이 바싹바싹 마르며 몸이 떨립니다. 소름이 끼치며 머리털이 쭈뼛쭈뼛 섭니다.” 이어진 탄식을 계속 들어보자 오 크리슈나여! 큰아버지의 아들들을 죽인다고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악할지라도 저들을 죽이면 씻지 못할 죄인이 될 것입니다.”     


  딜레마란 이런 경우. 살면서 겪는 고약한 일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고 해결책도 보이지 않으니 망연자실할밖에. 마침내 아르주나는 전의를 상실한 채 활과 화살을 떨구며 전차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바가바드기타1장은 이렇게 아르주나의 비탄으로 마무리된다.     


 

 삶의 질곡이 곧 고통이. 하지만 고통을 겪지 않은 인생은 없으리라. 이유 모를 딜레마의 고통은 삶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얼마 전 한 권을 읽었. 이어령 교수의 임종 전에 육성을 들은 수 있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다. 내용 가운데  딸 이민아 목사에 대한 이어령 교수의 회고는 애틋했다. 교수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달리 한 딸을 가리켜 ‘깨물어  너무나 아픈 손가락’이라고 말한다.


 이화여를 삼 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미국에서 법률가가 되었던 딸. 하지만 딸이 거듭된 이혼과 생활고, 아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당할 줄 어떻게 알았으리오. 이런 고난을 거치면서 딸 이민아미국 검사를 버리고 목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생애를 뜨거운 신앙으로 살다가 이른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령 교수는 딸의 애잔한 삶을 지켜보면서 삶의 고통을 성찰하듯 토로하고 있었다.     


 오래전 출판된 이어령 교수의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도 딸의 삶을 통해 얻었던 영적 통찰을 담고 있었다. 남미의 신학자 카를로 카르토는 주여, ?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당신은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어령 교수도 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책을 덮으면서 우리의 삶이 곧 전쟁이구나 싶어졌다.    


 2장부터는 아르주나의 질문에 대한 크리슈나 신의 답이 펼쳐진다. 바야흐로 『바가바드기타』 본류에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이어령 교수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전쟁터에 나선 아르주나일 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신의 말씀에 귀를 쫑긋 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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