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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Mar 23. 2024

행복한 음악회

 드디어 예매 성공이다. 늦은 밤 컴퓨터를 바라보면서 환호한다. ‘11월 둘째 주 토요일 5시 예약 완료.’ 이날은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정기 공연일이다. 이번 공연 레퍼토리가 바그너와 브람스이라니 꼭 가보고 싶었다. 클래식 음악에 밝지는 지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때면 행복했다.

     

 몇 해 전 문화예술회관 로비에서 학창 시절 은사님과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다. 졸업한 지 40년 되어가니 나를 기억할 리는 없다. 하지만 은사님은 반가운 얼굴로 이런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냐흐뭇해하셨. 은사님은 시립교향악단에 정기 후원을 한다고 했다. 객석으로 향하시는  모습마저 멋있어 보였다.     

 

 코로나가 기승일 무렵 공연장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극장도 텅텅 비었던 시절이 아니던가. 코로나 봉인이 풀리자, 다시금 음악회를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웬걸, 희한하게도 공연 일정과 직장 업무가 자주 겹치면서 작년에는 고작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공연만을 찾았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올해도 연주회를 찾을 기회가 없었다.  


 얼마 전 혹시 하는 마음으로 공연 일정을 알아보니 토요일 오후에 시향 연주회가 있었다. 토요일이라면 공연장 나들이가 가능했다. 레퍼토리는 바그너와 브람스 4번 교향곡. 놓칠 수 없는 음악회였다. 실로 일 년 만에 찾아온 기회. 그날 저녁 들뜬 기분으로 온라인 예매를 시도했는데 예약 방법이 전과 달랐다. 기계치인 나로서는 난감한 노릇이었다.   

   

 몇 차례 예약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은근히 자존심도 상하고 복잡한 예약 알고리즘에 짜증이 났다. 새삼 아날로그 세대의 서러움을 맛본 기분이랄까. 현장에서 표를 예매할 수 있었던 옛날이 그리웠다. 결국 아들의 도움으로 자정 무렵에서야 예약에 성공했. ‘111117. A석 가열 107이란 확인 문자에 감개무량했다. 결제비는 단돈 만 원.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기쁨 두 배인 액수.   

            

 공연 관람비는 천차만별이다, 외벌이 형편 탓에 십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공연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관람하고 싶은 마음도 그다지 없었다. 오히려 과한 공연료에 심사가 뒤틀리곤 했다. 때로는 비싼 공연을 보고 난 이들이 떠드는 호들갑도 마땅치 않았다. 아무튼 오만 원, 삼만 원, 만 원이라는 가성비 높은 공연은고마운 선물이었다.  

    

 이번에 예약된 A석 가열은 1층에서 우측이다. 정중앙 VIP석이라면 연주자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겠지만 1층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호강하기엔 충분하다. 그동안 이렇게 단돈 만 원으로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말러, 라흐마니노프 등 숱한 유명 음악가의 레퍼토리를 감상할 수 있었으니 은사님 말처럼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어떤 이는 '싼 것이 비지떡'이라며 비웃을 것이다. 물론 지방 교향악단이 세계의 유명 교향악단과는 견줄 수 없겠으나 내게 시향의 연주는 베를린필에 못지않았다. 결코 만 원을 호가한다는 음악회가 부럽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볼 때는 행복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시간가량의 연주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내 마음의 연주회는 계속되고 있는지 걸음은 리듬을 타기 바쁘.

 

 나는 풍류에 젬병이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골프채 한번 잡아본 적도 없다. 대신 카페에서 노닐기와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야말로 가성비 좋은 여가 생활이자, 내 용돈의 범주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남이야 뭐라든 무슨 상관이랴. 이것이 내 삶인 것을. 어찌 보면 정신 승리,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얼마 전 과분한 공연 티켓을 선물로 받았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리사이틀이었다. 공연 장소는 광주 예술회관 대극장. 서울에서 은행 지점장으로 있는 처남이 보내준 것이었다. 은행에서 우수 고객을 위한 일종의 이벤트라고 했다. CD로만 감상했던 조수미를 현장에서 볼 수 있다니, 처남의 은혜가 하늘 같았다.       

    

 공연 당일, 설레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가을이 내려앉고 있는 거리로 나섰다. 처남은 현장에서 다시 좌석이 적혀있는 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이왕이면 1층 맨 앞이면 좋겠다고 중얼대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아이구 욕심도~ 무조건 1층이면 돼라고 했지만, 기대하기는 나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술회관 대극장에 도착해서 수령한 입장권에는 ‘2층 라열 117이란 숫자가 적혀있었다.      


  우리는 에이~ 2층이네. 그래도 맨 뒷줄은 아닐 거야’라면서 계단을 밟았다. 그날 말이 씨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리는 점점 뒤쪽으로 향한 끝에 지정된 좌석을 찾았다. ‘이럴 수가. 설마 했는데...거기만 아니면 된다던 그곳. 우리의 자리는 2층 맨 끝었다. 아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나는 아쉬워하는 그녀의 팔을 뚝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조수미잖아

    

  기다리던 공연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무대에 등장한 조수미가 작은 인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풍부한 성량은 공연장을 쩌렁쩌렁 채우기엔 충분했다. 다행스럽게도 1부 중간부터는 대형 스크린에 조수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렇게 작은 체구의 조수미와 큰 얼굴의 조수미를 번갈아 보면서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노래를 감상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조수미가 노래했던 당신을 사랑해요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아내는 조수미를 직접 보았다며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내기 바쁘다. 모처럼 자랑질이다. 그래도 좋다. 멀리서나마 조수미를 본 것은 사실이니까.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여러분, 약오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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