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장애란 말이 있다. 이는 물건을 버리지 못한 채 마냥 모아 두려는 강박관념을 뜻한다. 얼마 전 심각한 저장장애를 가진 초로의 남성이 방송에 나왔다. 그가 머무는 모든 공간은 책의 밀림이었다. 방은 물론이요, 거실과 주방까지 온통 책, 책뿐이다. 심지어 외출할 때도 십여 권의 책을 캐리어 가방에 넣고 다녔다.
책은 알찬 삶을 보장해 주는 수표다. 나는 술을 못하고 담배도 기관지염 때문에 끊었으며, 골프나 낚시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다 보니 책을 가까이 하게되었으며소박한 서재도 있다. 내 서재를 본 이웃들은 작은 도서실 같다며 감탄하기도 한다.
작년부터 서재에 책을 둘 공간이 부족하기 시작했다. 해결책으로 새 책 구입을 자제하고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다. 또한 새 책을 구입하면 권수만큼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냈건만 여전히 책의 밀도는 높았다. 서재의 묵은 서향은 좋지만, 책들은 비좁다고 아우성이었다.
얼마 전 집을 매물로 내놓았다. 평수를 줄여서 이사할 계획이다. 한데 막상 이사를 생각해 보니 책들이 걸림돌이었다. 이를 어느 정도 처리해야만 작은 평수로 옮길 수 있었다. 아내는 내게 어머니 집에 책을 가져다 놓을 수 없냐고 하지만, 어머니가 질색할 테니 마땅한 해결법은 아니었다. 이럴 땐 안면 있는 북카페에 기증이라도 하련만, 이런 곳도 찾을 수 없었다.
버림에 대한 고민은 법정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에도 나온다. 스님은 생전에 책이나 음반이 제법 쌓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무소유를 몸으로 실천했다고 전한다. 나도 필요한 몇 권의 책만 추린 다음, 과감하게 책의 무소유의 실천을 상상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아무튼 해결법을 찾아야 했다.
버리기가 어렵다면 우선 남겨둘 것부터 고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이사 결정이 나면 무자비하게 처분할 것이 아니던가. 현재 열 개인 책장도 네 개 정도만 남겨야 한다. 결국 선택의 날이 되면 책들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수십 년간 내 곁에 머물던 책들이 이럴 수 있냐며 항변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책을 예상해 본다. 법정, 신영복, 류시화, 김용옥, 이현주 목사의 책들은 살아날 확률이 높다. 유발 하라리의 도서도 구제받을 것이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사>나 엘리위젤의 소설에는 그 시절의 애틋함이 있으니 버릴 수 없다. 처치가 애매한 경우도 있으니김훈, 이문열, 공지영 작가의 소설류가 그렇다. 이런 경우 책의 생존은 당일 기분에 따라 좌우될 확률이 높다.
지난 주말에 묵은 오디오 세트를 버렸다. 몇 해 전부터 처리할 작정이었으나 시급한 것이 아니어서 지금껏 다용도실에 잠들어 있었다. 그날 폐가전 제품 수거함에 오디오 세트를 버렸더니 기분마저 가벼웠다. 한껏 상쾌해진 기분에 그간 공간만 차지했던 비디오테이프들도 버렸다. 오디오와 비디오가 사라진 자리는 말끔했고, 소화불량에서 벗어난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마침내 책과의 이별을 단행했다. 가장 먼저 버림을 받았던 것은 <태백산맥>이었다. 검은 표지에 붉은 산맥이 그려진 이 작품은 1980년대를 대변하는 조정래의 대하소설이다. 권수는 무려 열 권. 당시 이 책을 읽지 않았던 청춘들이 얼마나 될까. 어떤 이는 불멸의 도서라고 칭송하지만, 미안하게도 <태백산맥>이 먼저 내 서재에서 쫓겨났다.
이어서 추방된 책은 황석영의 <장길산>이었다. 5 공화국 시절, 정의를 그리워하던 독자들이 사랑했던 책이다. 그런데 언제 샀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심지어 제대로 읽었는지 알쏭달쏭하다. 모두 열 권인데 현재 내게는 여섯 권만 있는 것으로 보아, 중도에 읽기를 포기했음이 틀림없다.
한승원의 <동학제>는 버릴까, 말까.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아내와 사귈 무렵 열심히 읽었던 책이다. 지금도 떠오른다. 퇴근 후 데이트를 위해서 시내버스에 오를 때면 이 책을 읽었던 내 모습이. 마침 <동학제>를 완독 했던 날은 추석이었고, 그날 나는 어른들에게 결혼 승낙을 받았다. 이런 사연이 있으니 쉽게 버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버림을 받은 책 가운데는 대하소설이 많다. 잠시 박경리의 <토지>도 처분할까 고민했을 정도다. 물론 손대기 어려웠다. 박경리 선생님의 굵은 뿔테 안경과 문학의 열정이 떠올랐다. 드라마와 소설 그리고 평사리 최참판댁으로 이어지는 <토지>를 버리기란 어려울 것 같다.
반면에 고민 없이 처분했던 책은 <현대 음운론>, <신라불교설화연구>, <한국문학사의 쟁점>과 같은 전공 서적이었다. 이들과 작별을 고하며 내용을 펼쳐보니 군데군데 “수업 끝나면 무등야구장으로”나 “W와 주말 극장”과 같은 메모가 보였다. 책을 버리다가 잠시 지난 추억에 잠겼다. 여태껏 버티고 있는 전공 책 몇 권이 있는데,그 중심에는 이가원 역 <삼국유사>가 있다. 무려 열 번 넘게 보았던 책이니 영원히 버리지 못할 거다.
버림은 순환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아꼈던 난초 화분을 이웃에게 주었던 법정 스님의 결기를 배워야겠다. 처분하는 책마다 타임캡슐처럼 나름의 사연이 스며있다. 어수룩했던 내 청춘 시절, 힘이 되었던 책을 매정하게 내치기란 쉽지만 버림과 생성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릴 수는 없다. 그동안 서재에서 함께 동거했던 책들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처분할 책꾸러미를 바라본다. 유정이든 무정이든 모든 정과의 이별은 어렵나 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는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이 나온다. 이 밤 책과의 날카로운 첫 키스를 떠올리며 정든 님을 서재 밖으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