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꽃 소년』, 박노해
눈에서 파란빛이 일렁인다. 그는 덧에 걸린 한 마리 호랑이였다.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박해받는 노동자 해방)가 포승줄에 묶여 백일하에 모습을 드러난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모든 뉴스 첫머리는 사노맹의 괴수 박노해 체포에 대한 보도였다. 얼마 뒤 법정에 선 그는 방청석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수갑 찬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시인이자 혁명가 박노해는 우리 곁에서 나타났고 사라졌다.
시집 『노동의 새벽』은 시대의 혈서였다. 풀빛출판사에서 나왔던 시집 표지에는 박노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 쓰린 가슴에 찬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 「노동의 새벽」 중에서
신석정 시집과 이문열 소설을 들고 다니던 내게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학우들은 노동의 새벽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그 세계로 더 이상 빨려가는 것이 두려웠다. 스무 살 시절, 내게 박노해는 막연한 존경과 두려움으로 범벅된 혁명 전사였다.
부활 미사 중 대주교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박노해의 『눈물꽃 소년』을 읽어보라고. 제목을 듣는 순간, 언뜻 신간 소개란에서 보았던 생각이 났다. 며칠 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눈물꽃 소년』이 내 손에 들어왔다. 상큼한 민트빛 표지 뒤에 펼쳐지는 소년 기평의 어린 시절로 빠져들었다.
『눈물꽃 소년』는 소설 같은 자전적 수필이다. 한 소년의 성장 과정을 흙 마당과 골목길, 학교와 장터, 공소 등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다. 책장을 넘기면서 무엇이 한 인간을 빚어내는지. 부모와 아이, 스승과 제자, 이웃과 친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해보곤 했다. 그것은 시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 어린 날의 초상화였다.
어린 시절을 압도하는 존재는 엄마다. 모성애가 부성애를 뛰어넘는 까닭이다. 사상범이 되어 현실에서 사라진 남편을 대신해서 어린 피붙이들을 책임져야 했던 시인의 어머니.『눈물꽃 소년』의 눈물은 어머니의 고난을 뜻한다. 어린 꽃송이들은 모성애의 눈물을 먹고서 피어나는 법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눈물과 자식은 망하지 않으니. 나의 힘, 나의 빛, 어머니의 눈물 기도”(224쪽)라고.
시인이 교도소에 갇혀 있을쯤, 나는 가정과 직장이란 안온함에 만족하는 소시민이었다. 『노동의 새벽』도 시인도 한 장의 빛바랜 추억일 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느 날 혁명 전사 박노해가 7년 6개월 만에 출옥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가 마침내 출감하는구나. 눈에 불길이 일렁이던 맹수도 얌전한 망아지가 된 모양이지. 한때 체게바라로 여겼던 그에 대한 외경심도 소환되었다. 우리 사회는 형식적 민주주의로 전환 중이었고 노동 해방 따위의 구호가 희미해지는 신자유주의 세상이었다.
시인은 “과거를 팔아 살지 않겠다”라는 말과 함께 세상으로 나왔다. 그의 옥중 수기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는 발효된 그의 정신이 풍겼다. 칼과 총을 내려놓은 시인은 카메라를 손에 쥐고서 변방의 오지로 향했다. 그 후 20년간 그는 펜이 아닌 눈과 발품으로 가난과 분쟁의 땅을 기록했다. 그의 사진첩은 입소문을 타고서 세상으로 조용히 흘러갔다.
어떤 이는 간디를 가리켜 스스로 평화가 된 존재라 했다. 이상적인 평등을 외치며 킬링필드라는 지옥을 창조한 캄보디아의 폴포트, 대약진이란 선동으로 숱한 생명을 아사(餓死) 몰아넣었던 마오쩌둥. 순수한 혈통을 지키자며 600만 유대인 도륙한 히틀러. 평화는 유약한 것, 오직 강철 같은 이념만이 살길이라며 소리를 높였다. 스스로 평화롭지 못했던 이념 중독자일 뿐이었다.
박노해는 간디의 길을 선택했다. 걷고 또 걸으면서 평화를 찾아다니는 평화 일꾼이 되었다. 혹시 위장술이 아니냐는 의혹마저 불식시킬 만큼 시인은 세상의 소음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곤 스스로 평화가 되어갔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공소 신부님의 사랑, 훗날 생태의 마을 사제가 된 형 기호에게 받은 씨앗이 발아된 것이었다. 소년 기평이는 공동체의 사랑을 고스란히 먹고 자란 평화의 묘목이었다.
『눈물꽃 소년』에는 공동체의 오래된 지혜가 나타난다. 소년 박기평을 키운 것은 마을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까. 잘 물어가면 다아 잘 되니께”(12쪽) 오랜 삶을 살아온 어르신들이 일러주는 인생의 비밀은 이렇게 다음 세대에게 이어진다.
법정에 선 그를 가리켜 담당 검사는 서울대 출신도 아닌 사람이 이런 수준 높은 시를 쓸 수 없다고 했다. 감성에도 계급이 있다는 천박함에 말문이 막힌다. 서린상고 야간부 졸업, 노동운동 투신, 약대 출신 아내와의 만남(요즘 화제인 뉴라이트 김문수가 주선) 사형 선고와 출옥. 고난의 땅을 다니며 평화를 모색하는 걷는 인간 박노해. 소년 박기평에서 시인 박노해까지, 그는 기구한 삶에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이다.
“아직 피지 않은 모든 것을 이미 품고 있던 그날. 우리의 소년 소녀 시절에”라는 책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흥 동강은 내게 뿌리인 곳이다. 이번 제삿날에는 동강 친지들에게 소년 박기평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혹시 아는가. 동강의 터줏대감 큰형이 "나 기평이 알 제, 나랑 동창이여" 할지. 어쩌면 소년 기평의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