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낮이 가장 길고, 밤 9시가 되어도 훤하다. 가로등은 밤 9시 25분에 켜지고, 맞은편 아파트의 불은 밤 10시를 넘지 못하고 대부분 꺼진다.
밤이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높은 산바람에 마음을 빼앗겨, 발코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다.
아침은 산책으로 시작된다.
아이들을 바래다주고, 하루 내 쌓인 쓰레기를 내다 버린다. 2,30대 때는 좋은 것도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이제는 매일 좋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나를 가꿔나가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예전과는 달리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걷는다.
내가 사는 곳의 길은, 큰길과 사람들이 다져놓은 오솔길이 여러 개, 늘 함께 있다. 큰 길이 넓고 직선이라면, 오솔길은 좁고곡선이다. 대부분의 오솔길은 숲 속을 관통해서 나 있다. 걸어서 가기에는 오히려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목적지를 정하고, 그날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해 가상의 줄로 잇는다. 그 과정이 재미있다.
지난 어느 날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골라, 발을 감싸고 있던 양말과 신발을 벗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금세 마음까지 올라와 울렁이게 만든다. 낙엽들과 나뭇가지들이 거칠까 걱정했지만, 보드랍다. 그러다가 큰길로 올라와서는 포장길이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작은 돌알갱이도 시멘트와 내 발 사이에서 부대껴 따갑게 느껴진다.
숲 속을 걷다가 밀밭사잇길로 걷는다. 밀은 물이 없는 땅에서도 잘 자란다고 들었다. 땅은 단단하고 쩍쩍 갈라져있지만, 다른 자연의 흔적은 없다. 마치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있어서 어떠한 나뭇잎도 여기까지는 차마 다다르지 못한 거 같다.
사람들이 떠나간다.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 떠나가는 것은, 나에게는 많은 친구가 떠나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도 몇 년 만에 아는 사람을 만났다.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려나 보다. 길을 나설 때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지만, 어느새 그 친구와 밀밭을 걷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그 친구도 맨발이다. 저 길 끝은 어디로 향할까? 남편과 아이들은 늘 중간에서 멈췄지만, 오늘은 궁금했던 길을 끝까지 걸어가 보았다. 그 길 끝에는 또 다른 길이, 마을이 연결되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 위로는 빨갛게 익은 체리 나무가 점점이 서 있었다.
흙은 모든 걸 키워낸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흙에다 뿌리를 박고 있다.
나도 흙에서 자란 것들을 먹고, 힘을 낸다.
언젠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맨 발을 흙에 갖다 댄 것만으로도 나의 방어막이 허물어지고, 자연으로 충전된 것 같다. 그 접지된 느낌이 계속 생각난다. 어떤 날은 간밤의 비로 밀밭사잇길이 찰흙길로 변해있었다. 찰박찰박, 진흙이 맨발에 달라붙는다.
매일의 짧거나 긴 산책은, 특히 작가들에게는 필요하다고 들었다. 작가들은 장시간 앉아서 일을 하기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해당하는 건, 산책하다 보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그러다 아주 가끔, 괜찮은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어떨 땐 금방 달아나기도 하지만, 훗날 어느 날의 산책길에, 제 풀에 꺾여 다시 나타날 때가 있다. 그 순간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