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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Nov 04. 2023

베를린에서 <비닐하우스>를 본 소회

2023 베를린 한국독립영화제

(스포일러 포함)

베를린 한국독립영화제에 다녀왔다. <비닐하우스>라는 작품을 봤는데, 극장 안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상영되는 두 시간 동안 나는 이방인이 아닌 언어의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 먼 땅의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말 콘텐츠가 독일의 수도에서 접근 가능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봐도 감동적이다. 더군다나 상업영화가 아닌 한국의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제가 베를린에서 열린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기도 하고 '돈 안 되는 예술'의 가치가 꽤 인정받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와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번에 본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는 작품성까지 훌륭하니 정신적으로 큰 호사를 누렸다. 간병인으로 일하는 주인공 문정은 집이 없어 비닐하우스에 산다. 그는 어느 치매 노부부의 집에서 간병과 집안일을 하며 집다운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돈을 모은다. 노부부는 번듯한 집은 있지만 남편 태강은 노환과 질병으로 앞을 못 보는 데다 치매마저 시작되었고, 아내 화옥은 이미 중증 치매로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런 노부부의 수발을 드는 문정의 삶이 녹록할 리 없다. 남을 돌보며 힘겹게 조금씩 돈을 버는 동안 정작 자신의 모친은 또한 치매로 병상에 누워있고, 요양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 남의 손에 맡겨진다.


이 영화는 재치 넘치는 반전과 또 그에 대한 반전이 정말 좋았다. 예를 들면 실수로 화옥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문정이 119에 전화하려는 순간, 소년원에 수감 중인 아들이 갑자기 문정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아들은 그간 냉담하기만 했던 태도를 처음으로 바꾸어 화해의 메시지를 건넨다.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 문정은 신고하려던 마음을 접고 시체를 은닉하기로 한다. 그는 죽은 화옥을 비닐하우스의 장롱에 숨겨둔다. 그 와중에 태강의 금전적 도움으로 문정은 아들이 소년원에서 출소하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했고 이사를 준비한다. 문정은 더럽고 비참한 과거를 모두 비닐하우스에 버려두고 자신은 빠져나와 새로운 출발을 꿈꿨을까.


한편 아내가 사라진 걸 태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문정은 과감하게도 자신의 치매 걸린 어머니를 태강의 집에 들인다. 태강은 앞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내와 오랜 시간 신체접촉도 거의 없이 집안에서 부부간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살아왔다. 화옥을 목욕시키는 일, 옷 갈아입히는 일 같은 것은 늘 간병인인 문정의 역할이었다. 화옥은 아이처럼 밥을 떠먹여 줘야 하는 치매환자인지라 문정이 없을 때 태강이 보이지 않는 눈을 하고서 화옥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것이 둘 사이에 일어나는 유일한 교류였다. 그러니 새로운 누군가가 집에 들어와 말없이 아내 행세를 해도 태강은 바로 알아챌 수가 없다. 게다가 문정 어머니 역시 치매로 인해 말을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설정이라 아내가 뒤바뀌었지만 태강은 한참을 모르고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짜) 아내의 손이 화옥의 손과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챈 태강은 (가짜) 아내의 얼굴과 머리를 더듬어보는데, 본인 역시 치매 초기 환자라 자신의 인지력이 틀려 사람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이 사람이 정말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건지 확신이 없다. 계속해서 이상한 낌새가 있지만 태강은 그럴수록 자신의 치매 탓을 하고 절망한다. 이제 아내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니. 절망의 끝에서 태강은 아내 화옥이 오래 (아마도 한참 전에) 졸라왔던 일을 해주기로 한다. 아내의 목숨을 끊는 것. (가짜) 아내의 목을 조르는데 꽥꽥 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타인만 같다. 태강은 혼란스럽지만 여전히 자신이 정신이 나간 탓에 목소리가 낯설게 들리는 거라고 믿으며 꿋꿋이 화옥의 소원을 들어주고, 바로 후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즉 영화에 등장하는 치매 노인 세명 모두가 결국은 죽는다.


심적으로 부담스러울 정도로 음울한 스토리였지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시사적인 담론이다. 나는 이 영화를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기초적이고도 본질적이지만 심층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우리 모두의 질문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혈육인 문정의 아들은 영화 중반까지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 엄마와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정작 생판 남인 또 다른 인물 순남은 문정을 졸졸 따라다니며 ‘언니와 살고 싶다’고 하지만, 꺼림칙하다. 고작 몇 번 만난 남과 비닐하우스에 살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상황이란 부조리 그 자체다. 한편 태강은 부유한 환경에서 신사적으로 살아온 사람이지만 나이가 들고 병이 생기니 삶이 예전 같지 않다. 해외에 거주하는 자식과 손자들은 영상통화로나 얼굴을 볼 수 있고, 자식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이 문정의 존재이며, 문정이 없이는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해진다. 게다가 아내와의 관계 역시 내용물이 없어졌다. 아내는 정신도 없고 말도 없다. 둘은 각방을 쓰고, 어느 시점부터 태강은 화옥과 소통하려 노력하는 일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둘은 같이 산다기보다는 그저 같은 집에 '있다.' 영화는 비닐하우스로 상징되는 빈곤층의 비참한 주거 환경만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층의 안락하지만 인간소외로 채워진 집 역시 이상적 공간은 아니라는 점을 비추었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GV)의 자리가 있었다. 나는 위의 내용처럼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와 가난과 소외, 또 부유함과 소외와 같은 아이러니함이 보였는데 실제로 어떤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지 질문했고 이솔희 감독은 ‘정확하게 이해해 주셔서 덧붙일 말이 없다’고 했다. (나는 정말 신이 났다.) 그리고 특히 감독이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이 공간에서 결핍된 것이 다른 공간에는 있고, 그 다른 공간에는 이쪽 공간에 충족되어있는 어떤 것이 반대로 결핍되어 있는 구도’였다고 한다.


다른 관객들의 질문과 관점을 들어보는 일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어떤 독일인 관객은 영화 속 대사가 많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 간의 연민과 배려가 느껴졌다는 소감을 전했다. 거기에 이솔희 감독은 ‘대사를 최소화하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많이 넣은 것 같고, 특히 태강의 시각장애를 고려해 등장인물 간 손짓이나 표정, 행동 등 비언어적 방식으로 많은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했다’고 답변했다. 태강과 화옥의 관계에서 나는 ‘같은 방을 쓰지 않고 스킨십 안 하는 노부부의 모습은 당연한 게 아니라 씁쓸한 것’이라고 비판적인 생각을 했다면, 이 관객은 반대로 그럼에도 태강의 따뜻함이나 노부부 간의 신뢰 같은 것을 읽어볼 수 있었다니. 새로운 시각까지 배울 수 있었던, 정말 흔치 않은 자리에 다녀온 것 같다.


이솔희 감독의 말 중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한국에서 현실의 삶은 너무나 힘들고 치열해서 한국인들은 영화에서까지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더 나아가 ‘그러나 영화가 할 역할은 밝고 즐거운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 얻어야 할 행복을 대신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희망찬 이야기는 영화로 또 대리만족의 형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펼쳐져야 한다.’고 지적한 부분이 정말 와닿았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불운으로 격하시키고 시스템적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을 거북스러워하는 성숙하지 못한 정치문화가 계속된다면 불편함을 떠안는 건 사회적 약자층일 것이고, 큰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미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이들일 것이다.


이솔희 감독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도 (감독의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외모는 대략 사회초년생 정도로 보였다) 노인부양 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같은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그 난점을 예리하게 포착한 감독의 통찰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 젊지만 성숙한 목소리가 독일 베를린까지 와닿아 감동을 받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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