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라는 말이 좋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이가 좋다’라는 문장에서 ‘사이’는 우리의 관계 그 자체를 뜻하지만, ‘나무와 벤치 사이에 자전거가 있다’와 같은 경우에는 두 개체 가운데 있는 어떤 공간, 좁혀질 순 있어도 사라질 수는 없는 그 간격을 뜻하기도 한다.
독일인인 남자친구 초록이와 나의 사이는 아주 특별하다. 우리는 둘 다 실용적인 것 보다 멋있는 걸 좋아해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또 책 읽기와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우리의 공통점이다. 우리의 모국어는 다르지만 초록이는 오히려 나와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내 인생을 스쳐간 수많은 한국인들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알아주는 것 같다. 내가 한 문장을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일도 많고, 내가 내 생각을 표현해줄 적절한 독일어 단어를 찾지 못해 끙끙대면 그게 뭘지 같이 고민해준다. 내가 태어나 처음 사용한 고급 독일어 단어가 있으면 귀신같이 캐치해서 칭찬해줄 정도로 내 언어 세계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사이’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가지 의미처럼, 그와 나는 좋은 사이,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가운데에 어떤 간격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초록이와 나는 다른 대륙, 다른 문화에서 자랐으니 통하는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지 싶다. 특히 초록이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언어 전수가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면서 우리 ‘사이’에는 굉장히 재미있는 기류가 생겼다. 독일어와 한국어라는 두 언어는 정말 다르구나를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를 통해 익숙하다 못해 무감각해진 자신의 언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초록이가 내게 쿠스(Kuss: ‘키스’의 독일어)가 한국어로 뭔지 물었다. 나의 첫 번째 대답은 “그냥 영어처럼 키스.”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외래어 아닌 순우리말 ‘입맞춤’이 있었다. ‘입맞춤’이라는 단어가 바로 생각나지 않은 이유는 노래 가사나 문학 작품에서 접한 것 외에 일상에서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초록이에게 한 템포 지나서 ‘입맞춤’이라는 단어를 알려주며 이건 문학적 표현에 가깝고, ‘입’과 맞닿는다는 의미의 ‘맞춤’이 합쳐진 단어라고도 덧붙이니 그가 감탄했다.
“너네 언어 정말 아름답다.”
나는 기억을 돌이켜 보니 ‘입맞춤’이라는 단어를 써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입’과 ‘맞춤’의 조합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이 표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초록이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새롭고 놀랍다. 생각해보면 ‘입맞춤’은 영어의 ‘키스’ 혹은 독일어의 ‘쿠스’보다 훨씬 감각적인 표현이고 심지어 조심스러운 느낌까지 있어서 (혀나 침이 아니라 입이 맞닿는다) 정말 예쁘고 특별한 단어다. 이런 것들을 발견하면 나도 놀랍다.
초록이를 통해 재발견한 우리말의 흥미로운 특징은 이 외에도 많다. ‘밥은 먹었어?’가 안부인사가 될 정도로 음식이 우리 언어와 문화, 정신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 심지어 ‘밥 말고 빵 먹었어’하면 상대가 ‘제대로 먹고 다녀야지’할 정도로 쌀로 지은 ‘밥’이 거의 ‘식사’의 유의어처럼 쓰인다는 점. 또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든가 ‘다 된 죽에 코 빠뜨리기’, ‘매운 맛을 보여주마’와 같이 얼마나 많은 속담과 비유가 음식과 미각을 소재로 하고 있는지 일일이 셀 수가 없다.
초록이는 한국어 입문단계인 만큼 문법 지식과 어휘 수준이 아직 낮지만 덕분에 고정관념도 없다. 언젠가 번역하기 어려운 의성어, 의태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랑말랑’은 하리보 젤리 같은 질감이라고 설명해줬는데 초록이에게는 ‘말랑말랑’의 뜻 자체보다는 어감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나 보다. 며칠 후 초록이는 ‘말랑말랑 뮈-데(müde:‘피곤한, 졸린’의 독일어)’라는, 한국어와 독일어가 합쳐진 표현을 만들어냈다. ‘말랑말랑’의 어감이 피곤하고 나른해 잠들락 말락 할 때 기분 같다고 한다. 근본은 없지만 신선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실 ‘ㅁ’이 세 번 들어가서 인지 운율도 좋다. 나는 이런 발견과 발상이 너무 재미있다.
얼마 전 학교 도서관에서 함께 철학 코너를 둘러보다가 한국어로 된 책들을 발견하고 초록이는 나보다 더 신이 났다. 그는 그 중 한 권을 골라 내 손에 쥐어 주었는데, 표지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실려 있는 <철학 용어 용례 사전>이라는 책이었다. 속을 들여다보니 독일인이 표지 그림만 보고 랜덤으로 고른 책 치고는 너무나 훌륭한 책이었다. 이성, 자유, 사랑과 같은 30개의 중요한 철학 키워드를 비교적 쉬운 언어로 백과사전처럼 설명해주는 책이었다. 한국에서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나에게, 독일어로만 접해온 철학 용어들이 우리말로는 어떻게 쓰이고 이 단어를 어떤 철학자들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했는지를 아는 일은 사실 아주 중요하다.
이 책을 읽으며 요즘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한다. 철학과 유학생으로서 나는 머릿속 독일어와 한국어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싶지만 초록이의 연인으로서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이국적인 느낌, 서로의 언어에서 느끼는 이질감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한국어만 보면 ‘그녀의 언어다!’하고 신난 강아지처럼 꼬리치며 반가워하는 초록이의 모습이 좋아서, 그가 한국어를 영영 자기 말처럼 쓸 수 없었으면 좋겠다.
한국 출신의 독일 철학자인 한병철의 저서를 즐겨 읽는 것은 초록이와 나의 또 다른 공통분모다. 한병철은 오래 전부터 법적으로 독일인일 뿐만 아니라 한국어보다 독일어가 더 편하다고 할 정도로 여러모로 한국인이라기보다는 독일인에 가깝다. 그는 독일어로만 글을 쓰며,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그의 저서 <피로사회> 역시 독일어로 쓰였고, 한국어판은 본인이 아닌 다른 번역가가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그런 그가 <자본주의 그리고 죽음을 향한 충동(Kapitalismus und Todestrieb)>이라는 책에서 아름다움은 낯선 것에 있다고 강조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프랑스인이자 유대인인 가수 바바라가 <괴팅엔(Göttingen)>이라는 노래를 만들게 된 일화를 예로 전한다. 바바라가 독일 도시 괴팅엔에서 영감을 받은 후 이 도시 이름을 제목으로 한 노래를 만들고 이를 독일 대중 앞에서 불렀을 때 전달한 특별한 감동은 낯설고 다른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라고 한병철은 설명한다. 독일의 괴팅엔 같은 도시가 프랑스에 널려있었다면, 또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별 차이 없는 하나의 언어에 가까웠다면 이런 감동이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방인이 서툰 독일어로 독일 도시를 묘사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점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파리를 노래하는 사람은 많지만
괴팅엔을 노래하는 사람은 없네.
그래도 괴팅엔에는 사랑이 있지
괴팅엔에는, 괴팅엔에는.
위와 같은 <괴팅엔>의 가사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의 배경그림처럼 존재했을 괴팅엔을 서유럽 대도시 파리와 비교선상에 놓고 이를 심지어 사랑의 도시로 변모시켰다. 1964년 발표된 이 노래는 2차 대전 이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독일과 프랑스의 사이에 화해의 물꼬를 틀었다고까지 평가 받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병철은 이렇게 역설한다. “낯선 것, 이방인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 눈먼 상태나 다름없다.”
초록이와 내가 ‘우리 둘의 언어는 참 다르구나’ 느낄 때 좌절하기 보다는 흥미진진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더 많이 대화해야 하고 대화 내용 역시 다양하고 풍성하다. 새로이 어떤 다른 점을 찾으면 아직도 서로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쁘다. 한병철이 말하는 ‘낯설어서 아름다운 것’은 초록이와 나의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초록이는 가끔 내게 시를 써서 보내준다. 그러나 나는 독일생활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의 시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시어는 일상 언어와 조금 다르기도 하고, 문법도 논리도 시의 영역에서는 중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시를 읽은 나의 첫 반응은 대부분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꽤나 김이 빠질 것 같다. 하지만 내 리액션에 실망하거나 슬퍼하는 건 본 적이 없고, 시 쓰는 것 자체가 자기만족에 가까워 보인다. 오히려 내가 초록이의 한국어를 생각할 때 그러하듯 그도 내 독일어가 여전히 완벽하지 않고 아직 완전한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사실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와 나의 사이에는 어쩌면 아직도 메워야 할 틈이 아득히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틈이 사라져 우리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같은 수준의 언어를 쓰는 두 사람이 된다면 지금과 같은 우리 ‘사이’는 없어져 버리는 것 아닐까 겁이 난다. 차라리 나는 초록이와 영영 100%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사이, 단 0.1%라도 이방인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한 발짝의 묘한 거리가 있는 그런 사이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