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기름을 쥐어짜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 산을 깎아 만든 도로를 지나곤 했다. 어느 겨울날에 수박을 주문하겠다고 떼를 쓴 적 있다. 바다와 긴 씨름을 하지 않고도 먼 곳에 도착해봤다. 탄광-혹은 그를 모방한 공장-에서 났을 보석으로 손을 장식한 채, 사료를 기다리는 동물의 밥그릇을 채워주기도 했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과거의 나는 자연을 언제든지 통제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창고, 다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물자를 대는 창고쯤으로 여겼다. 자연을 예찬하는 시를 읽고 강가에 서면 감탄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나와 자연 사이의 교감은 주인과 도구 사이의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이러니 자연이 왕 위의 왕으로서 인간을 위협하며 그 위에 군림하던 일은 내게 태곳적의 이야기로 전락했었다. 자연을 무서워하기는커녕, 그것에 대해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산다는 것은 결국 숨 쉬는 것이어서 산소라는 자연을 들이마셔야 하는데도, 별다른 고려 없이 자연을 간과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일방적으로 착취할 만한 것도,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니다. 자연의 진정한 현현 앞에서 움츠린 경험 이후로, 나는 자연을 활용할지라도 어떤경외심을 품고 있게 되었다. 마치 파우스트가 자연의 힘을 갈망하고, 공경하고, 그를 통해 치유 받았던 것처럼 된 것이다.
파우스트는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에 가까워지기를 갈망한다. 서재에 박혀 공부에만 매진하는 삶을 회의하면서 파우스트는 “산속 동굴 주변을 정령들과 함께 떠돌고/네[달빛] 어스름한 빛을 안고 풀밭 위를 걸으며/모든 지식의 짙은 연기에서 벗어나/네 이슬로 건강하게 목욕을 할 수만 있다면!”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연은 인위의 연기로 가려지지 않은 진실된 것이며 건강을 가져다주는 것으로서, 그것에 접근할 경우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자연은 범접할 수 없는 힘으로 묘사된다. 파우스트는 그 앞에서 스스로의 유한성을 느끼며 자연에 대한 더없는 동경심을 느낀다. 예를 들어 파우스트는 대지의 정령을 서재로 불러내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 존재감과 외관에 압도되어 “두려움으로 움츠린”다. 뒤이어 그는 독백을 통해 자신이 “신들과 같지 않”은 “벌레와도 같은 존재”이며, 그 어떤 인위적인 도구들(지렛대, 나사 등)로도 “자연이 네[인간의] 정신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 것”을 끄집어낼 수 없음을 인정한다. 즉 제 아무리 똑똑하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파우스트 역시 자연의 힘이 가감없이 드러난 상황을 감당할 수 없는 부족한 인간이다.
마지막으로 파우스트는 자연의 치유력을 통해서 절망으로부터 벗어난다. 2부의 시작에서 그는 풀밭에 누워 “삶의 맥박이 새로이 활기차게 뛰며 [...] 그대[대지]는 지고의 존재를 향해 항시 노력해가려는/힘찬 결심을 내 안에 불러일으켰도다/여명 속에 세계는 이미 활짝 열렸다”고 말한다. 그는 낙원과도 같은 자연경관과의 교감을 통해 새로운 행동을 감행할 힘을 얻는다. 자책감에 빠져 잠들어 있던 그가 태양과 무지개의 도움을 받아서, 곧장 황제의 궁성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때 파우스트와 비슷하게 자연을 원하고, 그에 압도되고, 그로부터 치유 받은 경험이 있다. 처음에 목적지를 제주도로 정한 것은 대도시의 매연과 좁은 골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밀실에서 주어지는 의무들로부터 헤어 나오고 싶었다.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섬으로 훌쩍 떠나는 것이 당시 나의 바람이었다. 다양한 동기들을 종합해보면 나는 덧없음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겨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또 언제 무너지고 새 빌딩으로 대체될지 모르는데도 마치 절대적인 사물인 것 마냥 보행자를 내려다보는 마천루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건물 그 자체보다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어떤 정해진 진로, 고층 건물에 사무실을 갖는 ‘고고한’ 삶, 그에 대한 사회적 선망, 그리고 그 선망을 내면화했기 때문에 근심에 시달리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나아가 마천루가 시사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해 완수해야 할 과제들이 내 활력을 소모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꼈다. 무리해서 높은 학점을 좇거나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진로를 결정하고 마음이 아니라 돈을 따르는 일은 지극히 덧없어 보였다.
나는 무언가 자유롭고 지속적이고 중대한 것, 예컨대 파우스트를 혼내는 지령이 “영원한 바다”라고 말한 것, 의미로 찬 것, 그리하여 근원과 가까운 것을 원했다. 그리고 그를 향한 출발점이 자연에 있을 수도 있다는 올바른 추측을 해냈다. 실제로 성산일출봉의 입구에서 산을 둘러싸고 발달한 마을에 들어섰을 때, 어부로 일하거나 관광객을 위해 흑돼지를 굽는 사람들을 보면서 덧없는 인간은 영원한 자연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산다는 것을 느꼈다.
성산일출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절대자의 손가락으로 힘껏 주물린 듯한 바위들과, 그 지문을 따라 자라난 이끼들이 진정으로 고고한 자태를 하고 있었다. 세세한 잎맥에도, 서로를 얼싸안은 풀뿌리에도, 크고 작은 돌에도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는 지고한 예술가의 손길이 깃들어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이 인간임을 긍정할 수 있었다. 동식물은 인간보다 자연과 더 가까이서 활동하는 대신, 그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지는 못한다. 또 인간보다 강한 존재들, 예컨대 “자연이야 제멋대로 존재하라지!”라고 외치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악마는 자연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에 감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높기 때문에 가장 추워야할 그곳에서 너무도 따스한 햇살을 만났다. 그 온기에 감싸진 채로 일출봉의 누런 정수리, 그 너머의 옥색 바다, 그 위의 하늘과 마주했다. 고도 높은 들판에 자라난 풀들, 생성되자마자 사라지는 물결들, 창공을 떠받치는 구름들을 보면서 나는 시간의 흐름이 더뎌지는 것을 느꼈다. "Über alle Gipfeln ist Ruh"라는 괴테의 시구처럼, 그곳에서는 시간마저도 늘 서두르기만 했던 걸음을 멈추고 머무르는 것 같았다. 화산 폭발로 움푹 파인 정수리에는 자연의 자비로운 기운이 가득 차서, 자신을 보러온 모든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제 생명력을 나눠주고 있었다.
성산일출봉이 선물해준 그 힘은 내 마음속의 근심을 몰아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솟아오른 이 공간은 내 삶에 비하면 거의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견디어왔을 것이었다. 소나기에도 태풍에도, 진눈깨비에도 폭설에도 개의치 않은 채 고개를 쳐들고 섬을 살펴보았을 것이었다. 그 무던함과 일종의 너그러움을 본받는다면 인간으로서 맞는 시련 따위는 별 것이 아닐게 될 터였다. 게다가, 나라는 인간이 탄생하기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 이렇게 커다란 덩치로 정좌해있는 데에 비해 나의 고민들은 얼마나 작은가? 몇 천 년의 시간 앞에서, 몇 십 년 중에서도 몇몇 순간들에 한정되어 발생하는 나의 불안은 얼마나 하찮은가? 나는, 어차피 행동해서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이라면, 근심을 당장 멈추어도 무방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산일출봉의 바람은 내 확신을 승인해주었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마지막에 이르러 간척사업을 진행한다. 현명한 노인 필레몬은 이를 “바다의 권리를 축소하고/바다 대신에 주인이 되려고”하는 행위로 묘사한다. 바다를 메워버리려는 이 사업은 파우스트와 자연 사이의 어떤 관계를 암시하는가? 그리고 파우스트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감명 받은 나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그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파우스트의 간척사업을 단순한 자연 파괴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층위의 동기와 목적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파우스트가 바다로 시선을 돌린 것은 바다의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동시에 그 자유의 밑바탕에 자리한 무목적성에 공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얽매이지 않은 원소[바닷물]의 목적 없는 힘이라니!/그리하여 내 정신은 감히 비약을 시도하려는 것,/여기서 나는 싸우고 싶다, 이것을 나는 이겨내고 싶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때 파우스트가 “비약”이라고 표현한 바는, 바다와 같은 자유를 쟁취함과 동시에 그 맹목성을 개조해 유의미한 목적을 위하여 바다를 봉사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파우스트는 그가 바다를 판단했을 때 긍정적인 속성(자유)은 취하고, 부정적인 속성(맹목성)은 보완하고자 했다. 그렇게 바다가 스스로를 제한함으로써 기여해야 할 목표는 “수많은 사람들의 거처”이자 “안전치는 않으나 행동하며-자유롭게 살 수 있는 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간척사업의 핵심은 이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는 ‘노동’이다. 노동이야말로 자유로운 생활조건을 지향하며 목표의식이 뚜렷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은 그 원료로 자연을 필요로 한다. 자연에 인간의 손길을 더해서 삶을 개선시키는 가치를 창출해내는 과정이 바로 노동이다. 따라서 파우스트는 자연을 동경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자연을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더하는 데에 기여시키고자 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동경이 전제된다면 이와 같은 적극적인 태도는 자연을 소극적으로 관찰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단계이다. 자연을 감상하는 것에 그칠 때에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는 자연에 순응하고 마는 동식물과 달리 인간이 자연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객체로 인식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연의 일부이므로 분리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인간은 오히려 그 분리를 발판 삼아 한 단계 나아가서, 노동을 통해 자연의 일부를 제 삶을 위해 활용하면서 자연적 질서에 고유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편입시켜야 한다. 자연에 손 하나 대지 않는 것보다 이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파우스트의 자연관은 2부 제5막에 이르러 이와 같은 성장을 거쳤다.
이때 파우스트는 이전 경험들로부터 자연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한 상태에서 노동하기 때문에, 자연을 경시하면서 도구적으로만 바라보는 자연관과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공경을 전제로 자연에 인위를 가하는 파우스트의 노동은 자연과 인간적으로 공존하는 방식이지만, 공경 없이 자연을 착취하기만 하는 노동은 자연의 생명력을 뿌리째 앗아가는 타자의 습격이다.
나 역시 인간으로서 자연을 이용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여전히 자연을 통제한 길 위를 걷고 자연을 가공한 제품을 곁에 달고 산다. 하지만 파우스트가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 가운데서도 바다의 생명력과 자유로움 그리고 그 풍요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았듯 나 또한, 성산일출봉을 통해서 나눠받았던 자연의 힘과 그에 대한 동경, 그것이 내게 선사한 활력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품은 채 자연의 질서에 조화되고자 한다.
파우스트 내 구절 인용은 요한 볼프강 괴테, 김수용 역, 『파우스트 한 편의 비극』, 책세상, 2006.
2016년 겨울학기 김종영 선생님의 파우스트 독서고전세미나 수업에 제출한 리포트를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