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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Jun 26. 2016

칼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지성사 상 가장 치명적인 ‘저격’

   

    『독일 이데올로기』는 (i)맑스 이전의 독일 관념 철학 및 (ii)사회주의에 관한 당시의 각종 문헌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글에서는 특히 (i) 중에서도 맑스의 역사관이 체계적으로 전개된 I. 포이어바흐: 유물론적 관점과 관념론적 관점의 대립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이 부분은 3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이 역사의 진정한 발전 동력인가라는 연구 질문 하에 첫째, 기존의 역사철학을 비판하고 둘째, 맑스 자신의 대안적인 이론을 제시하며 셋째, 자본주의 사회의 특수성을 고찰함으로써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맑스에 의하면 당시 독일의 이데올로기, 특히 역사철학은 “사실과 실천적인 발전으로부터 유리된 관념사”[1]에 불과했다. 독일의 관념론자들은 생산관계에 내던져진 각각의 실질적 개인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표상되는 ‘인간’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그에 따라 역사는 물질적 환경으로부터 자율적인 정신이 자기 자신을 현상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의식, 관념, 정신 등의 비물질적인 것, 나아가 법, 국가, 정치 등의 상부구조는 모두 토대에 의해 규정된다. 왜냐하면 상부구조는 어디까지나 생산 수단을 소유한 지배계급의 사상의 반영물이기 때문이다.[2] 이처럼 의식의 피(被)규정성[3]을 전제로 독일 관념론을 비판한 맑스는 ‘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고, 그를 통해 타인과 어떻게 교류Verkehr하는가’를 고찰의 기초로 삼아 새로운 사관(史觀)을 전개시킨다. 이 새로운 사관의 목적은, 전통 독일 철학이 그래왔듯 의식적인 비판을 수행하거나 새로운 이성적 질서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소외시키는 사회 구조에 대한 실천적인 전복을 목표로 한다.


    맑스가 세계사의 근원적 추진력으로 설정한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낡은 생산관계(사적 소유 및 분업의 양식)가 발전된 생산력에 대한 질곡이 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계급 질서가 탄생한다. 특히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의 단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식민지 확장 이후 세계를 대상으로 형성된 시장과 자연과학적 발전을 등에 업은 부르주아지가 탄생했다. 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은 자기실현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화폐 사용이 활성화된 후 상호교류의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제거되었으며, 생산이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개인이 자신의 통제 하에 둘 수 없는 독립적인 요소들이 노동을 제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속에서 개인은 “자기의 실존을 위축시킬 경우에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4]게 되었다.


    맑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소외의 양상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전의 세계사적 단절들은 (유적 본질을 지닌) 개인 자체가 아니라 특정 계급에 속한 존재로서의 개인이 그 주체였기 때문에, 기존의 생산관계가 새로운 생산관계로 대체되었을 뿐 억압적인 구조 자체는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사적 소유를 철폐한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 그리고 계급적 대립을 주재하던 국가를 타파함으로써 억압의 구조적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I.은 끝이 난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탁월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이들 내의 모순을 최종적으로 지양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만큼은 막연한 낙관주의를 내비친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들이 단결하여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의 여러 조건들이 만족되면 그에 따라 문제들은 “당연히” 그리고 “저절로 사라지”[5]리란 입장을 견지한다. 이는 매우 경직된, 기계론적인 사관일 뿐만 아니라 마치 자본주의에는 없는 모든 낭만적인 시나리오를 공산주의에 투사한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나아가 여러 차례 강조되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에 비해 그러한 사회적 거대 구조물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 적어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둘째로 맑스가 당시 독일 이데올로그들에게 가했던 비판이 맑스 자신에게도 가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맑스는 독일 철학이 “특정한 개인들의 특수한 관계에 관한 그들의 사상이 마치 인간 일반에 관한 사상인 것처럼 떠벌린다”[6]고 비판한다. 그러나 맑스 역시 서구 중에서도 국한된 지역에 해당하는 특수한 역사를 근거로 주장을 전개했을 뿐이며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에 대해서는 딱히 가치 있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법칙이 세계사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 없을뿐더러 ‘보편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마르크스를 '맑스'라고 표기한 이유는 그것이 독일어로 Marx를 읽었을 때 가장 정확한 발음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 달린 각주는 다음과 같다.

[1]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김대웅 옮김, 『독일 이데올로기』, 2015, 두레, p. 85.

[2] 부연하자면 지배 계급은 “자신의 사상들에 보편성의 형식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공동의 이익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특수이익에 봉사하고 있다. 같은 책, p. 95.

[3] “의식은 의식된 존재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며”라는 유명한 말이 이 맥락에서 등장한다. 같은 책, p.61.

[4] 같은 책, p. 125.

[5] 같은 책, p. 96.

[6] 같은 책, p.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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