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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날만 Jun 29. 2016

캠퍼스의 중심

어느 문학적인 물리학


Case study: 학생회관 앞 공터. 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방향을 보지만 같은 공간을 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학교 캠퍼스에서 흔하디 흔하다. 그중에서 가장 무표정한 8명의 외면과 내면을 주시하라.


Case 1. 검은색 잠바에 청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

친구 중 한 명이 죽고 싶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날씨가 더우면 더워서, 과제가 많으면 많아서 죽고 싶다고 중얼거린 뒤-이 다음이 중요하다-웃는다.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가공할 말을 뱉은 뒤 가볍게 웃는 것이 그녀의 경멸스러운 습관이다. 오늘도 어김 없었다. 이건 진심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에 대한 모욕이다. 맘속으로는 이미 장례식까지 치르고 흰 꽃의 개수를 세고 있는데 정말 칼을 잡자니 두려운 사람, 고통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만 없었어도 진작에 혀를 깨물었을 사람, 곧 나 같은 사람에 대한 모욕이다. 제발 그 아이가 죽고 싶다는 공허한 말을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진실로 삶이 끝나길 바라는 사람은, 자신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마저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이 서럽다. 나는 어제 이미 죽어버렸어야 했을까?


Case 2. 뿔테 안경을 쓴, 아직 여드름이 나고 있는 남자

「뫼르소의 살인은 정당한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불문과 교양 수업을 위한 내 에세이의 제목이다. 나는 이 글에서 뫼르소를 난도질할 생각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차피 짧게 살다 말 것이기 때문에 언제 죽으나 똑같다는 뫼르소의 위선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교통사고로 내가 엄마를 잃었을 때 음주운전을 했던 그 개새끼도 뫼르소랑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던 화가였다. 내일을 사랑하는 여자였다.


Case 3. 빨간색 베레모를 쓰고 있는 여자

어렸을 때부터 해온 미술을 부모님의 반대로 포기하고 1년 후, 점수에 대충 맞춰 쓴 학과에 입학했다. 캠퍼스에서 미대생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내 잃어버린 꿈이 그들 사이를 유령처럼 거니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나의 미련들이 저기 수 백 명이나 각자, 확실한 현실들로 존재한다. 나와 그들 사이의 이 괴리를 견디지 못해 그저껜 술을 마시고 자퇴서를 인쇄했다. 그리고 어제는 맨 정신으로 마지막 서명을 제외한 모든 곳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Case 4. 주머니가 많은 가방을 멘, 턱밑이 거뭇거뭇한 남자

졸업할 학년이 되어 문득 생각해보니 내겐 꿈이 없다. 진부한 말이지만 진실로 늘 시키는 대로만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는 조언은 지긋지긋하다.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 가슴을 압박해야만 소리 나는 인형이다. 각종 요구들의 충실한 꼭두각시이자 대본에 지시되지 않은 것은 연기할 수 없는 배우. 혼자서는 그 어떤 것도 창조해낼 수 없는 최후의 인간. 혹은 거부도 환호도 하지 않는 식물. 아니, 죽었는데 살아있는 척 자위하는 미라. 아니, 나는 분명히, 한 개비의 가련한 불량 성냥…….


Case 5. 상의와 하의, 운동화까지도 흰색인, 배 나온 남자

지도교수와의 면담을 끝내고 그늘 아래서 불을 붙인다. 향수는 연구실에서 이미 뿌리고 나왔고 머리도 미리 빗었다. 이제 발을 가지런히 모은 뒤 어깨를 펴고 가슴만 힘차게 내밀면 된다. 완벽하게 균형적인 자세에 이르면 의례가 시작된다. 하루에 3번씩 이루어지는 이 매일의 제의를 통해, 나는 세속의 고뇌에서 벗어나서 쓰다면 쓰고 달다면 단 4500원짜리 본질을 들이마신다. 하루에 3번씩만 이루어지는 삶과의 대면. 그 이외의 시간은 철저히 그리고 처절히 무의미하다. 하얀 제기(祭器)를 입에 물고, 오 보잘것없는 인생의 유일한 성스러움이여 내게로 오라! 연기가 하늘의 신을 향해 손을 뻗는다!


Case 6. 분홍색 블라우스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키 작은 여자

나의 모든 사소한 선택-가령 어느 길로 강의실에 들어갈지, 어느 시각에 점심을 먹을지-은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과연 저런 존재가 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아니 성스러워서 매일 나의 반경에 두고 싶다. 그러나 정작 인사를 할 때엔 말을 더듬거나 눈시울을 붉히고 만다. 신 앞에 서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눈물의 사유이다. 사실 그녀가 남자이기만 했어도 신이 아니라 인간일 텐데 여자이기 때문에 슬픈 신이로구나.


Case 7. 검은색 잠바에 흰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

근 한 달 간 울지 않은 날이 없다. 겉으로 멀쩡한 척해도 속으론 소리 없는 폭격이 계속된다. 매 번 전멸의 고비를 겨우 넘기는 것이 일상이다. 평화로운 세상에나 혼자만의 전쟁이 치러진다. 관념의 내전에서 승자는 없다. 공습으로 황폐해진 나의 불쌍하고 병든 정신만이 남는다. 종전은 물론 휴전도 없다. 우울이란 이름의 악마는 왜 점점 강해지기만 하는 것인가? 내 안에 있는 것 중에 생명력 넘치는 것은 우울뿐인가…… 죽고 싶다, 하하하……


Case 8. 단정한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

30년째 사람의 감정에 대해 연구했고 어엿한 대학 심리학과의 정교수가 된 이튿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아내가 이혼을 통보했다.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단다. 그리하여 나는 현재 산책을 하며 머릿속에서 정서심리학을 다루는 저명한 학술지의 목차를 되짚고 있다.

 

Question: 위 사례들에서, 캠퍼스의 중심은 누구인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대답: “무한한 우주에서는 모든 점들이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다(p.9).”

참고문헌: 스티븐 호킹, 김동광 옮김,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까치, 2001.



Cover image: ⓒSalvador Dali, Galatea of the spheres,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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