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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다영 Oct 07. 2022

사직서에 진실을 쓸 수 있다면


 내가 맡은 업무 중에는 임직원들의 입사 서류와 사직서를 관리하는 일이 있다. 서류 종류도 많은 데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고 있는 입사 서류와 달리 사직서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은 정보만이 들어 있다. A4용지 한 장에 소속 부서와 직급, 성명과 사직 사유, 희망 퇴사 일자, 그리고 아래쪽에 작성일과 신청인의 서명 등이 간략하게 쓰여 있을 뿐이다. 사유란에는 보통 ‘개인 사정’이나 '일신상의 이유'라고 적혀있다.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가 정말 개인적인 사정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직원이 사직을 결정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얼마나 오래 하는지 경영진들은 짐작할 수 있을까?


  삼 년 가까이 다녔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였다. 사유란에는 역시 개인 사정이라고만 적었다. 회사의 어떠어떠한 부분들이 나와 맞지 않고, 어떤 제도는 불필요하고 어떤 부분은 보완되어야 한다고, 연봉이나 복지 제도에도 개선이 필요하다고는 적지 않았다. 이전부터 쌓여왔던 업무에 대한 피로감과 회의감, 조직 생활의 부당함에 크고 작은 불만들이 부단히 이어지면서 어느 순간 상황이 더 나아질 리 없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게다가 조직 내에서 나의 발전조차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만두는 수밖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 한 계절은 더 고민했던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둔 다음의 생활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사직을 결정하는 동안 나는 회사와 이별할 준비를 거의 마친 셈이었다. 처음 생각하고 방향을 잡았다가 이내 마음을 접고는 다시 끌어와 고민하고 결정하고 준비하는 동안 나는 천천히 회사와 이별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사직서를 내미는 나를 보며 사장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허둥대며 내게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이전에 그래 왔던 것처럼 집에 일이 있다거나 어디가 아프다거나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등 대충 둘러댈까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문득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맡은 업무에 비해 현저히 낮게 책정된 연봉과 불필요한 업무 프로세스, 조직 내의 성 불평등 문제와 연차 휴가 사용에 붙어있는 자잘한 규제들에 이르기까지 그간 퇴사를 고민하며 정리해왔던 불만과 고충에 관해 이야기했고, 이런 부분들이 개선되거나 보완되지 않을 것 같아서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사장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뭐 그런 걸로 회사를 그만두느냐고, 그런 애로 사항이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고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나의 연봉을 올려주었고, 연차 휴가 사용에 붙었던 규제들도 단박에 없애주었다. 뜻밖의 호탕한 호의에 놀란 나는 엉겁결에 사직서를 회수했지만, 일 년여 후에 결국 비슷한 이유로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또 다른 한 회사를 그만둘 때는 사직 사유란에 ‘근로 미 희망’이라고 적었던 적이 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는 사장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을 만큼, 그 회사는 심각하게 별로였다. 그 사장은 직원들을 대놓고 업신여겼고, 업무를 맡기면서도 직원을 신뢰하지 못해 매사에 절절맸다. 퇴근 후나 휴일에 수시로 업무 관련 연락을 했고, 아무 때나 예고 없이 회식을 잡았다. 가장 큰 문제는 습관적으로 성적인 농담을 한다는 것이었다. 퇴사를 결정하기까지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 회사를 그만두면서 사직서에 나 때문이라고 적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말을 찾는 일도 너무 성의있게 느껴졌다.


  직장생활을 꽤 오래 했음에도 여전히 사직서를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사직서를 제출한 후에는 대개 인사 담당자나 경영진과 면담하게 된다. 전에는 그 시간이 너무 불편해서 거짓말을 했었다. 상대가 달리 할 말이 없게끔, 여지없이 내 사직서를 수리할 수밖에 없도록 ‘정말이지 아쉽지만 부득이하게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이유를 만들어내곤 했다.

  사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던 적은 별로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하는 속담처럼 그저 회사가 싫어서 떠났을 뿐이다. 조직의 체계와 문화를 바꾸기에 나라는 개인은 너무도 미미하고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았으므로, 지겹고 질리고 지난한 시간을 겨우겨우 버티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사직서에 회사를 그만두는 진짜 이유를 쓴다면 어떨까? 혹은 회사에 다녔던 후기를 쓴다면? 거기에 면담 희망 여부도 체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직서에 다 적었으니 나는 사측과 더 할 말이 없다는 의사를 전달할 수 있도록.

  퇴사는 회사와 이별하는 일이고, 사직서는 이별을 문서화하는 것이다. 그 문서에 '개인 사정'이 아닌 진짜 이유를 쓰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너와 헤어지고 싶은 이유에 대해, 함께 하는 동안 좋았거나 싫었던 부분들에 대해 한 시절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문장을 적다 보면 조금은 속이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다. 기업도 잡플래닛 같은 서비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직원들의 속마음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재직 중인 근로자보다는 퇴사를 결심한 직원에게 진실을 들을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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