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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배씨 Oct 20. 2019

동네 흔한 도서관 출근자

나는 왜 도서관 처돌이가 되었나에 대한 두서없는 혼잣말

독서실보다 도서관이 좋았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독서실보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게 좋았다. 일단 밤을 새워 공부할 계획 따위 있지도 않았고, 매점도 있고, 책도 있고, 답답한 칸막이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저녁 먹고 집에서 드라마를 봐야 하니까 6시가 넘도록 밖에서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공부가 안되던 고3의 어느 날 즉흥적으로 토지 시리즈를 다 읽어보고 싶어서 일주일간 공부를 휴업해 버리는 멋진 프로젝트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도 학교 열람실 같은 적막한 곳에서는 영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약간의 소음 속에 오픈된 테이블에서 공부하는 초창기 카공족의 한 명이 되기도 했다. 물론 돈이 들어가기도 하고 거친 학교 언덕길을 내려가기 싫으면 빈 강의실이라는 대안도 있었다. (어쨌든 대학 도서관에서 오픈테이블에 공부할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휴직 이후 빈시간에도 역시 나는 도서관을 찾게 되었다. 도서관을 찾는 새로운 이유가 추가되었는데 일단 집에 있으면 하지도 않으면서 괜스레 눈에 밟히는 청소할 거리, 설거지할 거리, 등의 집안일이 내 눈을 혼란시켰다. 그리고 집에서는 이어폰 쓸 필요 없이 스피커를 켜면 되니까 넷플릭스 시청의 유혹에 더 쉽게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매일 오전 약속이 없는 날은 출근하다시피 도서관을 향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주말에 종종 오기는 했지만, 도서관에서 나 혼자 조용히 책을 읽거나 공부할 수 있는 기회는 전무했다. 큰 아이는 이 책을 찾아 달라 내 손을 잡아끌고 자료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둘째는 아직 글을 못 읽으니 책을 계속 내가 읽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혼자 오전 시간에 도서관에 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고 즐거웠다.

 동네 도서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료실은 2층 일반자료실이지만, 우리나라 성인들은 어찌나 학구열과 일에 대한 열정이 어마무시 한지, 평일 오전 시간에도 은퇴하신 어르신들,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학생들, 나와 같은 어머님들이 가득해 앉을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책만 빌리고 곧장 1층 카페테리아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도서관 카페테리아는 공공복지 시설이기 때문에, 어르신 일자리 창출 사업의 일환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으신 어르신들이 커피를 내려주시고, 저렴한 가격에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자료실과 달리 햇빛이 양껏 들이쳐도 되니 사방이 창이라 아주 환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좀 학업의 뜨거운 열기가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아... 나는 사실은 그 열기가 부담스러워서 어릴 때부터 치열한 학업의 열기로 들어찬 독서실이나 열람실을 싫어했던 건가? 새삼스러운 깨달음도 얻었다.


마틸다에게 도서관은 마음의 집, 나에게 도서관은?
도서관 원조 처돌이 마틸다와 돌배씨

도서관에 대해 얘기하자니, 로알드 달의 마틸다가 생각난다. 마틸다는 부모에게 방임된 소녀이다. 가족이 있지만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집이 있으되 편안히 있지 못한다. 그래서 마틸다는 동네 도서관에서 자란다. 상처 받은 마음도 치유하고 자신의 영리함도 키우고. 허니 선생님이라는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기 전 까지는 거의 그곳에서 살다시피 한다. 나는 마틸다처럼 도서관을 안식처 삼을 정도의 고난은 없지만, 분명히 도서관에 있으면 뭔가 편안하다. 특별히 책을 많이 읽거나 대여하지 않아도. 그 공간에서 공부하고 음악 듣고, 신간도서 목록을 보고 하는 등의 모든 행위가 즐겁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그렇게 콩알만 한 집은 아니지만 4인 가족이 지내기에 꽉 들어찬,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소박한 공간이다. 그렇다 보니 각각 수면을 취하고, 아이들의 장난감, 책, 옷과 이불 등을 채워 넣을 정도의 공간이 마련될 뿐, 나나 남편의 개별적인 공간은 따로 없다. 거실에 있는 식탁 겸 테이블이 유일하게 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집 안에 내 개인적 공간이 없다는 건 크게 불평할 일은 아니나 어쩐지 마음을 허하게 만든다. 그렇게 내 개인적 공간에 대한 갈망이 도서관 같은 곳을 찾게 만든다. 적어도 같은 공간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완벽히 타인이니, 각자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 존재하니까 내가 앉은 곳이 어쩐지 가상의 부스 같이 개별적 공간처럼 느껴진다.


 문득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특별하게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뭐가 있을지 궁금하다. 마틸다, 러브레터 정도가 생각난다. 다빈치 코드에 나온 장면은 수도원이었나, 도서관이었나? 러브레터도 마찬가지지만 영화 속 도서관은 보통은 로맨스의 알콩달콩함을 보여주는 공간, 뭔가를 조사하기 위해 알아내는 공간, 아니면 수줍은 짝사랑녀가 사서로 있는 공간처럼 부수적인 기능적 공간으로 많이 나온 것 같다. 이렇게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도서관인데, 동네 도서관에 헌정하는 이야기 하나쯤 써보고 싶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추리소설 미스 마플 시리즈처럼 동네 해결사 겸, 탐정의 역할을 하는 여자 주인공이 도서관 처돌이인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항상 도서관에 죽치고 있기에 동네 사람들이 사건 해결을 의뢰하러 도서관에 그녀를 찾아오는 것이다. 재밌겠다. 우선 내가 추리물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지는 일단 쓰면서 알아봐야 할 일이다.


 모두 동네에 마음으로 세 평 정도 전세 낸 도서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별 거 안 해도 최소한 이런 생산적인 잡념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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