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vid Ann Jan 24. 2021

'딸바보'에 대한 단상

부성애도 당연하지 않다


*2017년 2월 6일 작성


어느 주말 오후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해서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고 다녀 왔었다.
하필 그때 유독 아기가 울며 보챘었나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빠는 쉼을 원하는 듯 보였지만
해야 할 집안일이 산더미에다가
나 또한 2시간이 넘는 사투를 벌이고 온 터라 여력이 없었다.

끝 없는 집안일과 아기돌봄은 자정이 다 되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돌아서면 보채는 아기를 아빠가 흔들어가며 달래고 있었다.


그때, 난 남편의 표정에 분노와 미움과 고단함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난 얼른 아기를 아빠에게서 데려오고
남편에게 어서 자라고 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라고 했다.

난 적잖이 당황했다. 그날 밤에 잘 때까지 멍했다.
내가 이토록 놀라는 것에도 당황했다.
난 왜 그 표정에 충격을 받았을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난 당연히 남편이 딸바보일거라 믿었다.
아기를 낳기 전부터 나보다 딸을 더 사랑스럽게 바라볼거라 생각했다. 태어나자마자 감격하기 시작해서 모든 순간에 사랑을 폭포같이 퍼부을 거라고.

하지만 남편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부터 50일이 지나도록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물론 아기를 볼 때 좋아하기는 했지만 좋아 미쳐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을 때도 의아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할 때도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처럼 무한한 사랑을 주는 남자가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었다. 수 없이 부딪히고 맞춰가고 포기하고 결심하고 각오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난 모성애를 강요하고 당연시 여기는 것에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다른 한편으론 '딸바보'를 당연시 여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이 딸과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 못내 미안하기도 했다.

물론 날이 갈수록 아빠와 딸은 서로 얼굴만 보면 웃는 돈독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지만, 난 그 날의 충격을 잊지 않고 싶다.

딸바보는 당연히 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부성애를 당연히 여기지 말고 고마워해야지.
고마워요. 내가 많이 고마워요.

작가의 이전글 육아에 지친 엄마에게 필요한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