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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란 Aug 27. 2019

도착하지 않은 사람과 남은 이야기

얖집 남자

                    앞집 남자



앞집 남자는 귀가하지 않았다. 101호 현관문에는 원룸 관리인이 매월 중순경 집집마다 붙여 놓은 관리비 청구서가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전기요금 고지서를 꺼내다가 각종 우편물로 넘쳐나는 앞집 우편함에서 가스와 전기요금 독촉장을 보았다. 

나는 방 하나와 화장실, 외짝 싱크대가 놓인 7평 남짓 되는 공간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초등학교 후문에 위치한 다세대 주택은 반지하에서 3층까지 총 16가구가 살았다. 더러 가족이 함께 살기도 했지만 대부분 1인 가구였다. 이곳에 방을 얻은 지 2년이 지났지만 나는 이웃과 한 번도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오가며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고 설령 말을 걸어오더라도 어색해서 외면할 게 뻔했다.

대학 강의가 없는 방학이면 아침 10시쯤 작업실에 도착해서 저녁 준비를 하러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작업실에 머물러 글을 쓴다. 강의를 하거나 외부 행사가 있는 날이면 오후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했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작업이 안 되는 날이면 현관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소리와 초등학교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내지르는 소리에 진저리쳐댔다.

작업실을 들고 날 때마다 네 가구가 세 들어 사는 1층 좁은 현관을 재빨리 살폈다. 102호 앞은 이틀이 멀다고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외국인이 세든 103에서는 이따금 내가 모르는 언어로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101호 현관문 손잡이에 나붙은 관리비 고지서는 그대로 있었다. 남자는 귀가하지 않았다. 현관문에 나붙은 관리비 고지서는 앞집 남자의 부재 증명서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모르는 남자를 걱정해야 할 까닭이 없지만 작업실을 오갈 때마다 101호 현관문으로 눈길이 향했다.

나는 십수 년 전 의정부시로 이사하면서 집 근처에 방 하나를 얻어 글을 쓰고 있다. 건물 주인이 바뀌거나 월세가 올라 몇 차례 방을 옮겼는데 크기가 엇비슷했다. 나는 부동산 직원을 따라 방을 보러 다녔다, 세입자가 부재중이면 직원이 여벌의 열쇠로 문을 열었는데 남의 방을 몰래 훔쳐보는 듯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자리를 비울 때 방을 보러온 사람들은 잔뜩 어질러진 공간에 놀랄지 몰랐다. 밥그릇이며 옷가지 하나 없는 좁은 내 방에는 책장과 책상, 컴퓨터, 책뿐이었다. 내가 없는 방으로 들어가는 모르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면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부동산 직원을 따라 다니며 싱글 침대와 옷장, 화장대로 사용하는 서랍장, 주방 살림살이가 정결한 방과 행거에 옷가지가 잔뜩 걸리고 바닥에도 아무렇게나 널린 데다 설거지를 하지 않은 그릇들이 쌓여 있는 어수선한 방을 보았다. 세입자가 부재했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성별과 성격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너저분한 내 방은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이사하고 몇 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전에 살았던 방으로 갔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걸어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야 잘못 온 줄 깨닫고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글을 썼던 방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먹고 잠드는 공간이었다. 근처에 내 방이 있고 특별히 아쉬울 게 없지만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지독히 추운 좁은 방이었다. 하루에 커피를 넉 잔 이상 마시고 글이 잘 풀리면 혼잣말하면서 웃었던 방이었다. 두 해가 넘도록 아침저녁으로 오갔어도 한 사람의 이웃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101호 현관문에 한국전력 공사의 계고장이 나붙어 있었다. 전기요금을 체납해서 전기 공급 중단 날짜를 알리는 경고장이었다. 101호 우편함은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어젯밤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는데 방은 썰렁하지 않았다. 103호에서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았어도 이웃에서 난방을 해 내 방은 얼어붙지 않았다.

현관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도시가스 안전 점검을 나왔다고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현관문을 열자 가스회사 로고를 새긴 두툼한 점퍼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가 가스레인지와 보일러를 점검하고 나가면서 이곳에 비어 있는 집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꾸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101호 남자가 귀가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어질러져 있는 방이 민망해서 얼른 현관문을 닫았다. 6개월에 한 번 작업실 벨을 누르는 검침원 여자는 추운 방에 전기난로를 켜놓고 내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내 방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검침원 여자 한 사람뿐이었다.

101호 현관문에 도시가스 안전 점검 안내장이 나붙었다. 관리비 청구서가 한 장 더 추가되고 한국전력공사의 계고장과 광고전단지가 지저분했다. 나는 작업실을 오갈 때마다 귀가하지 않는 남자 생각을 했다. 남자가 돌아왔을 때 형광등이 켜지지 않고 보일러를 돌릴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라 오랫동안 방을 비워두는지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다. 

아침에 귤 몇 알을 가방에 넣고 작업실로 갔다. 101호 현관문이 말끔했다. 우편함을 가득 채웠던 고지서와 광고전단지는 치워지고 없었다. 나는 작업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밤새 비워둔 방은 썰렁하지 않았다. 102호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101호에서 나는 소리일지 몰랐다.

나는 남자의 방이 춥지 않기 바랐다. 온기 있는 방에서 남자가 고단한 몸을 누이고 편히 쉴 수 있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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