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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양냉면먹고파 Mar 05. 2024

30대 초반에 이혼하고 얻은 결론

(문제 1) 그래서 이혼의 원인이 뭐야?

“난 자꾸 네가 내 탓하는 것 같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던 전 남편이 한 달 동안 집을 나가 생활하고 나와 다시 조우했을 때 뱉은 말이었다. 남편과 떨어져 있는 동안 나는 제발 다시 잘해보자고, 처음부터 당신을 이해해 보겠다며, 혹여나 질려서 도망갈까 봐 꾸역꾸역 감정을 삼켜가며 문자를 보냈었다.


‘그 문자들을 보고서도 저런 말을 한다고? 내가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잘못한 거지?’



“너는 어떻게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니? 처음부터 걔 별로였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안 했던 거지. “


소란스러운 이별을 거치면서 근근이 매 끼니를 삼키고 있는 내게 우리 엄마가 뱉은 말이었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가 결국엔 실패이고 그 잘못이 나한테 있다고? 더 큰 문제는 나 조차도 ‘내가 현명하지 못한 탓’, ‘내가 제대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탓’, ‘내가 더 참지 못한 탓‘이라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기엔 나는 너무 억울했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온통 이혼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으며, 누가 어떤 부분에서 잘못했는지 꼬치꼬치 과거를 곱씹어가며 심판자의 역할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이혼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동안 내 인생은 문제 풀이와도 같았다. 단순했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시험 점수가 좋지 않으면 그건 내가 공부를 덜했거나 내 공부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외부에서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저런 단순한 상황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로 돌려야 해결방법도 나온다. 다음에 시험을 더 잘 보기 위해서는 ‘내가’ 부족한 공부를 더 하면 되고, 공부 방법이 잘 못된 것이었다면 ‘내’ 공부 방법을 바꾸면 됐다. 가는 길은 험했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결국엔 원하는 것을 얻어냈고, 짧다면 짧은 30여 년을 살면서 터득한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던져진 이혼이라는 문제는 너무 나도 어려웠다. 남편에게 전적으로 잘못이 있다고 탓하기엔 그 사람이 입었을 상처가 떠올라 차마 스스로를 기만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연애를 5년이나 하고 반년도 채 안돼 끝나버린 이별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기엔 내가 그동안에 입은 상처와 내가 바쳤던 진심이 너무 안타까웠다.


안 좋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으레 그 안 좋은 상황이 누구 때문에 발생했는지 잘잘못을 따지기 좋아한다. 더 이상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한 본능도 있겠지만, 안 좋은 상황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든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가며 그 사람에게 비난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쏟아내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평범한 사랑 이별 앞에서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이 '쓰레기'로 둔갑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 게 아닐까 한다. 


한편, 사회적으로 합의된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넘어서는 것들(도대체 어디까지가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예컨대 범죄, 도박, 폭력, 바람 등의 사유로 인한 이별은 그 귀책사유가 대체적으로는 명확할 것이다. 혹은 최근 방영된 '내 남편과 결혼해 줘'의 박민환(이이경 분) 정도*라면 별 큰 논쟁 없이 누구에게 이별의 잘못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않은 강지원(박민영 분)의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민환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을 테지만).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현생에서는 귀책사유가 명확하지 않은 이별이 더 많다.


*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자면, 아내의 절친과 바람을 피우고, 수틀리면 폭력을 일삼고, 아내의 사망보험금으로 재기를 노리는 천하의 나쁜 놈이다.


만일 그동안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봐 온 전지전능한 심판자가 관계에 대한 한치의 불공정함이 없는 바이블을 기반으로 ‘누구는 43%만큼 잘못했고, 누구는 57%만큼 잘 못했으니 결국 57% 잘못한 사람에게 이별의 원인이 조금 더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모든 이별에서 누가 더 쓰레기인지 판단하는 게 명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러한 심판자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관계에 대한 절대적 바이블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란 상호 작용에 기반한 것이며, 상호 작용에 따라 서로가 느끼는 감정들은 주관적이기에 같은 상황을 놓고도 서로가 경험하는 상처나 부정적 감정의 크기도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관계 앞에서는 절대성이라던지 공정함 따위의 가치가 끼어들기 힘들다. 그러니 어떻게 '네가 나에게 더 큰 상처를 줬고, 내가 너에게 준 상처는 별것 아니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대략 반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심판자의 역할을 그만뒀다. 이 세상엔 공식에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수학 문제처럼, 밀실에 증거하나 없는 살인 사건이라도 범인을 밝혀내는 명탐정 코난처럼 명쾌하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제에 대한 나만의 답을 내렸다. 


'우리가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흔히들 이야기하는 '성격차이'로는 답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결혼과 연애가 다르다고는 하나 5년이 넘는 연애 기간과 반년이 넘는 동거기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 세상에 퍼즐 맞춘 것처럼 꼭 맞는 관계가 얼마나 있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혼에 대해 집요하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 두 글자가 지닌 무게가 무거워서 일 것이다. 모든 이혼에 대해서 일반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연히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그런 이혼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해가 되지 않는 이혼 앞에서 '왜'라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면, 심판자의 역할을 내려놓고 이혼이라는 두 글자 대신 '이별'이라는 두 글자로 이해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조금 더 편안한 자신만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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