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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Jul 09. 2021

쓰레기말 너나 드세요

내 마음에 밥먹이기


낱말 공장 나라에는 세상의 모든 말들을 생산하는 낱말 공장이 있다. 사람들은 돈을 주고 낱말을 사서 삼켜야만 원하는 말을 할 수 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쓰레기통을 뒤져서 쓸데없는 말들이나 말찌꺼기들을 주워 담기도 하고 아이들은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낱말들을 잡기도 한다.


필레아스는 시벨을 정말 좋아하지만 가난해서 갖고 있는 낱말들이 많지 않았다.






체리, 먼지, 의자




세 개의 단어로 사랑하는 시벨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필레아스의 이야기.

        

현란하고 멋진 말들로 포장하지 않더라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들어있지 않은 그의 말속에서 사랑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고맥락 대화와 저맥락 대화가 있다.


이불속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데 엄마가 문을 열며 말한다.




지금이 몇 시니?




라는 질문에 시계를 바라보며 '9시 예요.'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아! 망했다!' 할 수도 있다. 저맥락 대화는 말 자체에 의미가 정확하게 포함된 언어다. 엄마가 정말 시간이 궁금한 것이었다면 저맥락 대화가 되겠지만 지각한 아이를 깨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면 지금이 몇 시냐고 묻는 것은 고맥락 대화가 된다. 만약 같은 상황에 '지금 9시야! 늦었다. 빨리 일어나라!'라고 얘기했다면 저맥락 대화가 될 것이다.


이런 고맥락, 저맥락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눈치껏 사는 삶에 잘 길들여져 왔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 남편이 사용한 '싸가지 없다'는 표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표현들이 난 불편하다고 말하자 친구는 웃으며 주말에 있었던 얘기를 해줬다. 결혼식에 늦게 도착해서 친척들과 인사를 나눌 타이밍을 놓쳤는데 엄마가 '너희들은 싸가지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일상의 언어일 수도 있다.


함께한 시간들, 상대에 대한 신뢰, 관계의 친밀함 안에서 나온 거친 단어를 상대가 말하고 싶었던 바람으로 해석하는 것은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최상의 컨디션이고 상대의 말 자체가 아니라 상대의 바람에 집중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와 여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은 365일 그렇게 살 수 없다.


믿는 관계를 내세워 쏟아낸 진심과 거리가 먼 말들. 그 말들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것은 모두 상대의 몫이다. 그리고 의미 찾기에 실패하면 똥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진다.










잠자리에서 둘째 율을 쓰다듬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희서 엄마 아기도 아니고, 민재 엄마 아기도 아니고, 율이 엄마 아기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나의 말을 자장가 삼아 잠드는 아이를 보며 나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며칠 후, 잠자리에 들기 위해 누운 나에게 아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희서 엄마도 아니고, 민재 엄마도 아니고, 율이 엄마가 돼줘서 고마워'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이는 녹음기 같다. 내가 어린시절 듣고 싶었던 말, 아이가 해주길 바라는 말이 있으면  아이의 마음에 녹음만 시켜 놓으면 된다. 그럼 언젠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순간에 다시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말하지 못하는 세상이 아니라 듣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듣지 못해서 말할 수 없다면, 낯간지러워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힘들다면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를 담아서 얘기하면 된다.





체리, 먼지, 의자




율과 나는 놀이를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얘기한다.


율: 엄마~ 체리~

나: 먼지~

율: 의자~

나, 율: 빠라람~~~(마음의 연결을 의미하는 축포)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책을 읽고 이것이 사랑을 말하는 말임을 알고 있다. 체리, 먼지, 의자는 우리 사이의 암호다.



쓰레기 같은 말들만 먹고살아서, 사랑의 단어를 갖고 있지 않아서 표현하기 어렵다면 말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한 눈 마주침으로 시작하자.


그리고 오늘부터라도 나를 위한 낱말 요리를 잘 만들어서 든든하게 먹이면 된다. 그러면 인생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계의 상대가 쓰레기 같은 말을 줬을 때 안 먹을 수 있다.






나 밥 먹었어요.
배불러요.
 너나 드세요~~







자존감 별거 없다. 그냥 마음의 밥을 잘 먹이면 알아서 큰다.



내가 들었던 체리, 먼지, 의자는 무엇인가?
낱말을 많이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상대에게 어떤 말들을 많이 먹였나?
내가 매일 먹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말이 사라지고 한 단어만 남길 수 있다면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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