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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un 25. 2024

<책>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_김이설

여성에 대해 덜 말해질 때란 결코 오지 않았다.

작가는 말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고. 2006년 <열세 살>로 서울신문, <엄마들>로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이설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의 초기작품만큼은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불행’이라 부르는 삶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놀라운 건 그 불행이 언제나 여성의 몸을 관통하고 있다는 거다.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쓴 숨이 올라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건, 폭력과 억압이 촘촘히 기록된 몸으로 아슬아슬하게 삶은 이어나가는 여성들 중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들은 나아가기는커녕 끝없이 무너지기만 하는 삶을 붙들고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간다. 누구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로 훼손된 몸과 마음을 덤덤히 추스를 뿐이다. 성적욕망의 대상이 되는 소녀들, 가부장적 사회구조 유지를 위해 자손생산의 도구가 되는 여성들, 스스럼없이 행해지는 폭력과 그걸 고스란히 받아내는 몸. 얼핏 듣기만 해도 세상에 대한 증오와 수치심이 바글거릴 것만 같은 이야기지만 소설 속 소녀와 여성들에겐 수치심이 없다. 아무 곳에서나 입으로 불쑥 들어오는 남성의 성기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보단 당장 살아야 할 내일이, 당장 먹어야 할 밥 한 끼가 더 중요하다.    

  

빈곤 청소년의 삶을 기록한 어느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빈곤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이다. 빈곤상태로 건강한 관계, 욕구발현의 기회가 좌절되고 박탈되는 사람들은 누구나 문제 행동을 보인다.” 그런데 만약 빈곤에 폭력이 더해진다면 어떨까. 나 혹은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트럭운전사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을까? 수건을 적셔 성기를 닦아주는 남자에게 다정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대리모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감독의 친구들 앞에서 다리를 벌리지 않을 수 있나? 아이를 위해 몸을 팔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일 김이설의 소설을 읽은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거다. 나라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일 이란걸 알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는 것. 쉽게 몸을 허락하면 안 된 다는 것. 폭력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는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당신은 갓길에 버려진 적이 있나?

-엄마와 함께 노숙생활을 해 본 적이 있나?

-감당할 수 없는 부채로 인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적이 있나?

-조모를 살해한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의 등골을 빼먹고 사는 오빠를 가져본 적이 있나?

-내일 아침 당장 먹을 수 있는 밥이 없어 본 적이 있나?

-불의의 사고로 자식과 남편을 잃고 길 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적이 있나?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난 적이 있나? 혹은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난 부모가 있나?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아니요’ 라면, 우리는 그럼에도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란 말을 쉽게 뱉어도 되는 걸까?      



<열세 살>을 읽으며 생각했다. 만일 내가 역사에서 그 아이를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그 아이가 입 모양으로 내게 씨발! 쳐. 다. 보. 지. 마!라고 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분명 난,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굴을 구겼을 거다. 만일 자식과 함께 있었다면 소설 속에 등장한 어떤 여자처럼 아이를 바싹 내게 끌어당겼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존재를 위협으로 느꼈을 거다. 윗옷을 훌렁 걷고 소리를 지르는 소녀의 엄마를 봤다면 후다닥 도망갔을 거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오늘 지하철역에서 정신 나간 아줌마와 이상한 아이를 봤다며 남편이나 친구에게 떠들어댔을지도. 노숙하는 아이는 상상해 본 적이 없어 그저 더럽고 예의 없는 아이라 생각했을 테고, 여성노숙인의 삶도 모르긴 마찬가지라 그가 아이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웃통을 벗어야만 했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들에겐 표정이나 몸짓으로, 뒤돌아선 가벼운 농담거리로 그들의 삶을 함부로 평가했을 거다.


더러운 아이와, 더러울 수밖에 없는 아이는 다르다. 분명 그걸 알면서도 나는, 너무 쉽게, 자주, 그럴 수밖에 없다는 조건은 생각하지 못한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볼 때면 ‘나’라는 진입장벽을 쉽게 넘지 못한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범했을 수많은 무례함 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만다.  

    

누군가의 불행을 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이 소설이라도 마찬가지다. 매 맞는 여자, 막 봉긋하게 올라온 아이의 가슴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몸을 내어주는 아이, 무언가를 선택할 겨를도 없이 길 위에 버려진 사람들, 세련된 외모를 갖지 못해 경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까지. 굳이 이렇게 까지 바닥을 치는 삶을 그려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은 그렇게 까지 바닥이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내가 딛고선 삶이 안온하다면 우리의 삶은 괜찮은 걸까?      



<오늘처럼 고요히>에 등장한 시숙의 폭력, 갓길에 선 소녀를 취하거나, 노숙인 여성들을 위협하는 남자들, 술집여자가 아닌 여자를 취할 때 더 흥분하는 남자들, 대리모를 통해서라도 대를 이어질 바라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떠올리건 스치듯 들었던 수많은 말들이었다.      


-여자 나이가 궁금하면 입술하고 겨살을 보면 돼 그럼 딱 견적 나온다니까. 나이 들면 입술에 주름이 생기고 겨살이 늘어나. 딱 보면 알 수 있어.

-아 씨발 여자도 없는데 술 쳐 먹고 앉아서 왜 그렇게 뭉그적거리냐.

-나는 뒷문이 좋아, 앞보단 뒤가 좋지 흐흐흐흐

-엄마들이 문제라니까. 자식이 하나라서 그래. 오냐오냐 그러니까 노키즈존이 생기는 거야

-시집 다 갔네 다 갔어.

-늦게까지 술 마신 게 문제지. 새벽에 집에 안 가고 거길 왜 따라가.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 잘 가는 게 최고야. 그게 돈 버는 거야.

-여자가 길에서 자면 볼짱 다 본 거지.      


소설에 등장하는 폭력의 출발점이 어쩌면 이런 말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여성에 대한 편견, 차별, 억압, 조롱, 멸시와 같은 말들. 음식점이나 마트,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마주쳤을지 모를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말. 결국 문제는, 남성이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여성혐오의 문화가 지금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거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이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은 아마도 이걸 뜻하는 거라 생각한다. 성과 자본의 교환. 성기의 교환가치. 상품이 되는 몸. - 우리의 아이들도 알고 있을 거다.

     


나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진 자주 엄마를 모욕했다. 깔보고 무시하는 말은 예사였다. 화가 나면 욕을 했고 종종 물건을 던졌다. 나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맞았다. 늘 누군가와 비교를 당했고 멍청하고 한심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매일이 그랬던 건 아니다. 매를 맞은 날보다 맞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그리고 내겐 누구보다 따뜻한 엄마가 있었다. 손을 잡고 함께 동네를 산책할 언니도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은 적도 없고 당장 내일의 한 끼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았다. 빚쟁이에 쫓겨 지하 원룸 방에서 네식구가 함께 지냈던 적도 있지만 수도를 돌리면 따뜻한 물이 나왔고, 밥을 굶지도 않았다. - 그럼에도 나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언제나 ‘불행’이라는 글자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나를 위해주고 아껴주고 좋아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친절이나 다정함은 내가 아버지에게 받았던 모욕이나 폭력을 전혀 상쇄시켜 주지 못했다. 존재가 박탈되는 것, 자아가 절멸하는 것, 그로 인해 바닥을 치고 삶이 무너지는 건 폭력의 횟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꼭 물리적인 폭력일 필요도 없다. 입의 씰룩거림이나 눈빛, 몸의 움직임만으로도 우리는 타인을 모욕할 수 있다. 존재가 무너지는 건 언제나 한 순간이다. 누구도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의 경중을 따져 무너진 이의 삶을 판단할 수 없다. 존재가 박탈된 상태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일 소설 속 인물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꼭 그래야만 했냐고 묻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해 보길 권한다. 그들에게 ‘왜?’라고 묻고 싶은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가진 생각(판단)의 궤적을 쫓는 것, 어떤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맥락과 구조를 보려고 애쓰는 일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내 안에 편견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혹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잠깐이라도 물음표를 던질 수 있다면 낯선 삶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반드시 공감의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해나 공감이 아니라,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삶 앞에서 눈을 감지 않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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