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개학해서 학교로, 입시생인 둘째는 피아노 학원으로, 그리고 연극캠프로 떠난 셋째 넷째 덕분에 오랜만에 집에 홀로 남겨졌다. 너무 좋아서 시원한 커피로 잠을 싹 날려 보내고, 앞 뒤로 문을 활짝 열어두고 청소를 했다. 해가 뜨거워 더운 공기가 집안에 가득 들어차도 기분이 좋았다. 콧등에 땀이 맺히고 목이 늘어난 헐렁한 티셔츠가 몸에 척척 들러붙지만 그것마저 괜찮은 날이다. 둘째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오기 전까지 내게 주어진 4시간. 대체 얼마 만에 가져보는 혼자만의 시간인지. 조용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 기쁨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기 위해 후다닥 창소를 끝냈다. 펄럭 거리는 옷소매를끌어다 땀을 닦고 소파에 앉으니 땀 때문에찝찝한 몸뚱이 따위 상관없이 마냥 상쾌한 아침이다.
청소를 끝내고 잘 정돈된집안을 휘둘러보는 건 오래된 나의 취미. 내겐, 그 찰나의 순간에 느끼는 희열과 성취감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던 날이 수두룩 하다. 그럼에도다둥이 엄마라서 온전히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단연깨끗하고 조용한 집. 내겐 그저 희망사항일 뿐인 그 요원한 소망은 아이들이 모두 학교로 출타한 시간 동안만 가능한 일이다.
아이들이 오면,거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제 자리를 벗어난다. 이불은 무너지고 책은 바닥을 굴러다닌다. 식기 건조기안에 잘 정돈되어 있던 컵은 모조리 다 싱크대 위로 출격. 소파 위 쿠션은 방마다 하나씩. 구석에 잘 세워뒀던 폼 롤러는 방 한가운데로.신발은 꼭 현관문 앞에 바싹 붙여벗어놓고,가방은 들어오는 순서대로 중문 앞에 착착 아무렇게나 쌓아둔다. 수건은 접힌 채로 변기 위에 던져두고,화장실 구석에 한 짝씩 처박힌 신발은 덤이다. 입던 옷은 꼭 빨래바구니를놔두고 바닥에 둥글고 넓- 게늘어놓는다(마치 더러운 카펫처럼).입던 잠옷이 책상의자에 걸려 있지만 서랍에서 새 잠옷을꺼내 빨래거리 만드는 건아이들의 변치 않는 특기랄까?
그러니 될 수 있으면 애들 때문에 힘들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도 방학만은 예외가 된다. 하루종일 어질러진 집을 계속 어지르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삶이 너무나 괴롭다. 게다가 돌밥이 뭐야. 나는, 그냥 쭉 ---- 밥이다. 입맛도 다르고, 배고픈 시간도 다르고, 학원 스케줄도 다 달라서, 4남매 밥 차리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 남들은 여름방학이 너무 짧다는데. 짧기는 뭐가 짧아.궁시렁 궁시렁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다둥이 엄마는 방학이면 정신줄 놓기 딱 좋아서, 늘 놓치는 정신줄을 올해도 어김없이 놓쳐 버렸다. 사실 그거 다시 잡으려고 이렇게 글이라도 써본다. 내가 쓰면서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우습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위로가 된다. 그래그래. 힘들었겠다. 고생했어. 수고했어. 잘했어. 같은 말이 내 안에서 하나씩 고개를 내미는 걸 보면.
오랜만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니, 그건 또 얼마나 좋던지. 아이들이 있을 때 늘어져 있는 건 맘이 편치 않은데, 혼자 있을 때 늘어져 있는 건 어쩜 이리편안할까. 소란한 틈에 갖는 한갓진 시간이라 그런지절로 충만해지는 기분에 거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을까 하다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나를 위해 내가 밥을 차리는 걸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닌데, 오늘은 밥도 하고 고등어도 한 마리 구웠다. 갓 지은 따뜻한 밥 위에 밥 친구를 뿌리니 먹음직스럽게 보여 기분이 좋다. 고등어와 밥 친구, 반찬은 그게 다지만 깨끗한 거실에 앉아 영화 한 편을 틀어 놓고 보니 꽤나 만족스럽다.
천천히 내 속도로 밥을 먹는 것. 엄마에게 그건 혼자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꼭꼭 씹어서 아주 천천히 밥 한 그릇을 먹었다. 나만 신경 쓰면 되는 밥상, 다 먹고 나도 별로 치울 것이 없는 그런 밥상을 오랜만에 누렸다. 복숭아도 깨끗하게 씻어 깎아 먹었다. 나를 위해 과일을 깎는 건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오늘은 참 별나게 나를 챙겼다. 대충 라면으로 때우고 책이나 봐야지 했는데, 소박하게나마 정성스러운 끼니로 나를 채우고 보니 잘했다 싶은 마음이다.
달콤한 천중도
아이들이 없어서 매일 돌아가던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틀었다. 땀을 식히느라 선풍기를 바싹 끌어당겨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앉으니 까뮈가(고양이) 슬렁슬렁 걸어와 내 옆에 벌렁 눕는다. 몰랑몰랑하고 부드러운 뱃살을 만져주니 몸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냐아옹 우는 귀여운 까뮈.
까뮈의 까만 털을 쓸어주면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으니 까뮈의 나른한 하품소리만 들린다.
이것이 평화가 아니면 무엇일까. 그래서 참 좋았고, '좋다'라는 말을 많이 해서 정말로 좋은 날 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