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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B Jul 13. 2020

나는 내가 좋은 상사가 될 줄 알았어

상사열전 上


나는 햇수로 약 6년동안 직장인으로 살면서 세 곳의 회사, 총 네개의 팀에서 일했다. 3번의 이직과 1번의 팀 트랜스퍼의 90%는 상사 때문이었고, 난 지금까지 내가 회사건 팀이건 옮겨야겠다고 다짐하게 한 그 상사들이 '객관적으로'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이상한 사람들을 피해서 온 현재의 팀에서 나는 드디어 내가 챙겨야 할 부하직원이 생겼고 (내가 정말 상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약 2개월 동안 겪으면서 나의 가치관에 큰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경험한 상사들은 정말 객관적으로 이상한 사람이지만, 상사가 아닌 부하직원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옵션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난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이건 같이 일하는 동료가 ‘이상한 사람/특이한 사람’ 이라는 그런 단편적인 느낌이 아니다. 상사의 이상함을 위계 때문에 버텨야 했던 것처럼, 부하 직원의 이상함 역시 위계 때문에 버텨야 한다. 이것을 처음 느낀 순간 나는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이상한 상사들에 대한 리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 사람들에게 견뎌야 하는 이상한 부하 직원이 아니었을까. 물론 내가 이상하다는 깨달음을 얻어봤자 그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다. 정말로 이상한 놈들이었다.

  




구멍가게보다 못한 첫 회사의 상사는 아주 좋은 분이었다. 배울 점도 많았고 무엇보다 같이 1년 밖에 일을 하지 않았는데, 본인이 퇴사할 때 내가 너를 데려왔으니(대학원 선배의 소개로 알바하다가 눌러앉게됨) 이런 쓰레기장에 너를 냅둘 수 없다며 나를 친히 다른 회사로 보내 버렸다는 점에서 책임감도 있는 양반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얼결에 두번째 회사를 다니게 됐고, 그곳에서 팀장 A와 팀장 B를 조우하게 된다.


두번째 회사는 사실상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제대로 된 조직이었다. 뭐 중소가 다 그렇듯이 거기도 주먹구구식으로 굴러가긴 했지만, 이사님과 단 둘이 일한 첫 회사에 비하자면야 '실장-팀장-과장-대리-연구원(사원)'이 모두 있는 팀은 정말 회사 같은 곳이었다. 처음 만난 것은 팀장 A였다.


팀장 A는 밑에 과장 둘, 대리 둘, 연구원(사원) 셋을 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모든 실무를 다 챙긴다고 했다. 그 팀에 있었던 선배들은 다 대충봐도 일을 졸라 잘해보이는데 왜 팀장이 실무를 직접 챙길까? 과장님들은 나이가 어린 여자들은 승진에서 불리하다는 한국 회사의 국룰에 따라 여즉 과장이었을 뿐, 연차건 능력이건 뭘 다 따져봐도 차장 이상 혹은 팀장급이었다. 그래서 팀장의 이런 선택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냥 제대로 된 회사가 그런거겠거니.. 하고 살았다. 어차피 국룰에 따라 이직한지 한달은 그냥 놀았으니까. 재앙은 이직한 후 딱 한달만에 처음맡게 된 프로젝트에서 터졌다.


프로젝트 자체는 어렵지 않아서 내가 해야 할 것도 큰 무리 없이 작업했는데 다만 내가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서 뭔가 확인을 해야 할게 있었다. 그래서 2015년 10월의 어떤 금요일 오후 다섯시, 나는 팀장 A에게 피드백을 요청했고 기다리라는 말에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때는 젊어서 그것도 참을 수 있었는갑지. 다섯시부터 시작된 기다림은 밤 열시 반이 되어야 끝났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고,  그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30페이지 정도 되는 자료에서 밑줄과 볼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원본]    나는 내 상사가 싫다. 싫은 이유를 단 하나만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싫다

[피드백] 나는 내 상사싫다. 싫은 이유단 하나만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싫다


A4용지 30장, 빽빽하게 가득차 있는 문장 하나하나 볼드와 밑줄을 체크하는 그 사람의 모습에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급하게  말했다.  "팀장님, 제가 궁금한건 상사는 싫어하고 다른 구성원들과 잘 지내는 사람을 조직 적응 실패자로 볼 수 있는가의 여부인데요"  내 질문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지금 작업된 것에 밑줄과 볼드, 그러니까 중요한게 제대로 강조되지 않았는데 이것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 이 긴 문서의 밑줄과 볼드를 다 체크하시겠다고요? 내가 팀장이라는 사람에게 받은 생애 첫 피드백은 이랬다. 그제서야 나는 밤 열시반까지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피드백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직 후 두달만에 나는 진지하게 해결책은 팀장 A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둘중에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사 때문에 받는 고통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팀장 A는 작업물을 가지고 가면 (문자 그대로) 종이를 뒤집어 엎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작업물은 확인 조차 받지 못한 채 그냥 이면지가 될 뿐이었다. 시간 낭비, 감정 낭비, 잉크 낭비.. 모든 자원이 고갈되고 쓰레기는 쌓인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오는 21세기에 이거는 말도 안됐다. 나는 팀장 A에게 이럴거면 니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그냥 시키라고 말했고, 그 말을 한지 두시간 후, 팀장 A가 다른 과장님께 내가 갈 수록 싸가지 없고 버릇없어 진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전달 받았다.


내가 팀장 A에 대한 하소연을 처음으로 털어놓은 담배메이트 대리님은 내 말을 듣더니 자기는 멱살을 잡을 뻔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나 뿐 아니라 모두가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다행이게도, 그는 내가 이직한지 6개월 만에 회사를 나갔다. 본인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는 과장님에게 '대표에게 함께가서 니가 나보다 더 받는 돈을 떼서 나한테 달라고 말하자' 라는 명언을 남기고.  


여튼, 팀장 A가 사라진 후, 실장님은 빠르게 팀장 B를 찾았다. 사실 팀에 있는 과장님 두분이 다 일을 엄청나게 잘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굳이 팀장이 필요할까? 했지만 프로젝트를 하는 주 업계가 남초였다. 영업을 위해서는 남자 팀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렇게 나는 팀장 B를 만났다. 팀장 B도 엄청난 사람이었다. 다만, 팀장 A도 엄청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을 읊으며 나간 사람을 그리워 할 일은 없었다는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팀장 B는 놀라울 정도로 일을 못했다. 그는 팀장이지만 착실하게 이직 후 한달을 놀았고, 처음으로 맡게 된 일은 내가 진행 한 프로젝트의 결과 보고 PT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프로젝트는 팀장 B가 온 것과 동시에 시작된 프로젝트라서 실장님은 팀장 B에게 그 프로젝트를 좀 챙기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팀장 B는 '자기는 아직 잘 모른다'는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최종 PT만 맡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는 나 하나만 죽어 나가면 돈이 들어오는 프로젝트였다. 심지어 일년에 4회 진행이라서 일년 내내 나 하나만 갈리면 총 비용의 90%가 남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였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도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왜냐면 팀장 B가 하게 되는 PT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대충 이름을 알 대기업의 CEO부터 그 회사의 모든 높은 분들이 다 참여하는 엄청난 규모의 PT였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두달 내내 클라이언트와 함께 밤을 샜다. 무려 CEO 보고인 덕분에 그쪽에서도 팀장이 검토하고 부장이 검토하고 상무가 검토하고... 토하도록 일했는데 클라이언트가 싫어지기 보다 안쓰러워진 프로젝트는 그게 유일했다. 여튼, 그렇게 해서 보고서가 나오고 PT 당일, 팀장 B는 전설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엄청난 PT를 하게 된다.


PT 내내 객석 뒤쪽에 앉아 있는 나와 클라이언트의 얼굴은 시시각각 사색이 되어갔다. 3천만원을 3천억이라고 말하고 있고, 대전을 대구라고 말하고 있고...  PT 시간은 15분이라는 사전 당부가 무색하게 그는 30분동안 돈을 준 사람들을 앞에 대고 나는 돈을 받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하나도 모른다는 것을 PT 하고 있었다. TV에 나와서 보이는 모습보다 더 인내력이 좋았던 CEO는 모든 PT를 다 들은 후, 앞으로 다시는 우리 회사와 일 하지 말라는 감상 한마디만을 남겼고, 쫓기듯 PT장을 나온 나는 돌아가서 실장님을 붙들고 울었다.


내가 불쌍하고 내 클라이언트는 더 불쌍했다. 세상에 제안PT가 아니라 결과보고 PT때문에 클라이언트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을 수 있나? 상상해본 적도 없는데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경험이 중요한 세상이라고 해도 내가 이런걸 왜 알아야 하는건지 참나... 그렇게 도망쳐 나온 후 한시간이 지나고 이번에는 클라이언트가 나에게 전화해서 울먹였다. 요즘 대학생도 그렇게 PT 안해요, 로 시작돼서 한시간동안 모든 부서에 다 불려 다녔다, 너랑 나랑 이렇게 죽도록 고생했는데 어떻게 PT 하나로 그게 다 망할 수 있냐. 약 20분 가량 이루어진 전화는 대충 그런 하소연이었다. 나는 또 울었고 팀장 B는 실장님 앞에서 그랬다.


본인이 준비가 부족했지만, 저렇게 사람을 가는 프로젝트는 안하느니만 못하니까 차라리 잘됐다고.


나는 다른 팀원들을 붙잡고 쌍욕을 내뱉는 것으로 팀장 B와의 첫 프로젝트에 대한 감상을 대신했다. 그 후 약 1년 반동안 나는 팀장 B와 천번을 싸운 후 이직을 결심했다. 싸우는 이유는 굉장히 다양하고 간단했다. 일을 못했고, 성인지 감수성이 바닥이었다. (ex. 여자는 무조건 어린애가 예뻐 / 여자인데 사근사근하지 못하고 무서워서 일 할 마음이 안든다) 나아가 그는 누군가가 본인의 아랫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견뎌하지 못했다. 클라이언트에게 뫄뫄대리님이 보고서를 잘 써줘서 결과 보고를 잘 마쳤다는 메일을 받자마자, 나는 그 잘썼다고 칭찬 받은 보고서에 들어가 있는 오타 하나로 세번 불려가서 욕을 먹었다.


지금 회사로 이직이 결정된 날, 나는 이직 통보를 하며 팀장 B에게 너 때문에 이직하는거라고 말했다. 이직한 회사는 앞의 두 회사와 비교하면 대기업 급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의 내 팀장 잔혹사도 끝날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내가 세상을 좀 몰랐다. 팀장 A와 팀장 B는 팀장 C를 만나기 위한 수련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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