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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음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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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정 Mar 10. 2024

다시, 처음

내게 머문 마음

  기차가 역사(驛舍)를 빠져나간다. 익숙한 풍경을 뒤로하고 기차가 내달린다. 기차의 출발지여서인지 자리는 드문드문 비었고 이야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준비한 듯한 고요가 나쁘지 않다. 빠르게 변하는 창밖 풍경을 배경으로 그와 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마주친 눈빛만으로 서로의 설레임이 충분히 읽힌다.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배경처럼 서로의 곁에 있어 주었다는 것이 새삼 고맙다. 자꾸만 우리를 앞질러 가는 것 같은 시간을 붙잡고 싶은 요즘이었다. 문득 기차의 목적지가 우리가 함께 한 과거의 어느 시점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달라지는 창밖 풍경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고요함을 다 즐기지도 못했는데 벌써 소란스럽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섭섭하기까지 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대구였다. 기차를 타고 싶었던 내가 대구를 선택한 이유는 가까워서였다. 아이 둘을 집에 남겨두고 저녁을 차리기 전까지 돌아오는 당일치기 여행지로 가장 만만했다. 우리는 기차여행을 하기로 했기에 지하철이나 도보로 갈 수 있는 곳만 가기로 했다. 지하철권인 독립서점 몇 군데와 핫하다는 대형백화점 정도만 방문하기로 하고 맛집 같은 곳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맛집 앞에서 대기할 시간도 없었고 둘이서만 떠난다는 것, 그 자체에 의의를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방문한 독립서점은 문이 닫혀있었다. 분명히 영업하는 날이라고 했는데 문은 잠겨있었다. 그 거리에는 그 서점말고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그저 쉬는 날인 것인지 아예 폐업을 한 것인지 정확하지 않았으나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어린 딸들을 데리고 왔던 여름에는 이보다 훨씬 더 번잡했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이 이 거리를 이토록 적막하게 만들었을까? 왠지 우리가 함께 한 흔적도 함께 지워지는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 백화점에도 들르고 다른 독립서점에도 가 보며 우리는 계속 걸었다. 특별한 것을 보지도 않았고 꼭 봐야 할 무언가를 정해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 없이 오롯이 둘이 걸으니 그 자체로 신선하고 특별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지만 우리는 정해둔 음식점이 없었기에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면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다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 분식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들어가려 하자 남편이 그 옆집으로 가 보자고 했다. 옆집은 간판도 한문(漢文)인데다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가게 앞에 맛집의 상징인 대기번호를 적는 종이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마치 이십 대 커플인 양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누군가가 우리 둘뿐이던 시절로 시간여행을 시켜주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준비해 둔 것만 같았다. 딸들이 없었기에 이것저것 가려 시킬 필요도 없었다. 나와 그는 오로지 각자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순도 100%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우연이 빚어낸 인연은 이번에도 큰 기쁨을 주었다. 그곳은 과연 맛집이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우리가 함께 겪었던, 인연이 된 우연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어쩌면 인생은 우연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우연들은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큰 기쁨을 주었고 좋은 인연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곤 했다. 이 식당도 우연히 들어왔지만 좋은 인연이 되어 두고두고 우리의 입에서 오르내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풍미 가득한 음식을 씹으며 행복을 음미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식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부모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다음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오자고 얘기했다. 큰딸은 무슨 메뉴를 좋아할지, 작은딸은 무엇을 고를지 떠올려보고 우리가 함께 올 수 있을 시간을 꼽아보았다. 혼자이던 우리가 둘이 만나 ‘부모’가 되었고 이제는 그 이름표를 달지 않은 우리를 생각지도 못한다. 사십 대가 이십 대로 돌아갈 수 없듯, 이미 부모인 우리가 부모가 되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갈 순 없나보다.     


  걷다 보니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카페도 나타났다. 커피를 유독 좋아하는 우리는 서스럼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각자의 취향에 맞게 커피를 시키고 편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적당히 따뜻한 커피,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실내, 눈빛을 주고 받으며 미소 짓는 우리의 대화. 모든 것의 온도가 적당했다. 다른 독립서점을 한 군데 더 돌아보고 역으로 향하는데 비가 왔다. 가방에는 우산이 들어있었지만 우리는 우산을 꺼내지 않았다. 맞아도 괜찮을 만큼 양이 적기도 했고 둘이 손잡고 빗속을 뛰는 것도 즐거웠다. 비 오는 출근길이었다면 기분이 달랐을 것이다. 누구와 함께, 어떻게 시간을 채워가느냐에 따라 이토록 달라질 수 있는 마음의 온도가 새삼 생경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대구에서 시간을 느리게 썼다. 멈추고 싶으면 언제든 멈추어 시간을 흘려보냈고 마주 잡은 손의 온기조차 느낄 만큼 여유로웠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고 어떠한 선택도 허용되었다. 우리가 마련한 시간 안에 오로지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온전함이 충만하게 행복했다. 오래 전 우리 둘뿐이던, 넷이 된 지금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때. 그때 느꼈던 감정과 재회했다. 부모가 되어서 누리는 지금의 안정과 넉넉함이 싫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우리 자신의 온전한 모습과 다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며칠 있으면 결혼기념일이다. 가끔 나이를 말할 때 나도 모르게 놀라거나 한숨 쉬는 경우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시간의 거리보다 그 숫자들의 실제 거리가 지나치게 멀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겨우 몇 년밖에 함께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16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레임이나 열정은 다소 바랬는지 몰라도 그간 쌓인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들이 바랜 빛을 대신해주고 있다.      


  머잖아 우리는 다시 둘이 될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시간처럼 오롯이 둘만 남을 것이다. 가끔 지금을 그리워할 것이고, 더 오래전의 시간들을 추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가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로 현재와 미래를 채우지는 않기를 바란다. 설사 우리가 걸어온 시간이 걸어갈 시간보다 긴 순간이 온다 해도 쓸쓸함보다 기대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내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로 사느라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때라도 마음이 이끄는 길로 주저 없이 걸어가고 싶다.      


  오늘의 짧았던 여행은 어쩌면 그날을 위한 예행연습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예행연습은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질지 벌써 기대된다. 수많은 예행연습을 거친 우리가 본 무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며 아름답게 공연을 마무리하면 좋겠다. 그로 인해 무대 위의 내가 빛났듯 나로 인해 그도 빛났으면 좋겠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앵콜 속에 멋지게 커튼콜도 하고 싶다. 함께 무대에 올라 나의 상대역이 되어 준 그에게 새삼 고맙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서로에게 훌륭한 상대역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아직 조명이 채 켜지지 않은 무대 뒤, 그와 나의 시간으로 써 내려간 대본을 읽으며 우리는 오늘도 호흡을 맞추고 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무대를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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