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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음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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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정 Mar 18. 2024

오래 전 그날

내게 머문 마음

  그가 고개를 돌린다. 확실히 그인지 다시 한번 더 본다. 생각보다 세련된 옷차림을 보자 왠지 그가 아닐 것 같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지금과는 달리 야위고 날카로워 보인다. 다음 장면은 더욱 유심히 살펴본다. 정말 나일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친구와 발랄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생경하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나다. 기억 속에 잠들어 있긴 했지만 보자마자 기억나는 옷차림에 내 손으로 직접 골랐던 백팩을 메고 있다. 자주 지나다니던 골목이고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늘 곁에 있었던 친구와 나란히 걷고 있다. 잊혀졌던 시간 속의 나는 생각보다 행복해 보였다.      


  남편과 두 딸, 그리고 나까지 총 네 명이 소속된 단톡방이 있다. 단톡방의 이름은 ‘내 편’. 우리는 그 단톡방에 각자의 소소한 소식을 올리거나 좋은 자료가 있으면 공유하곤 한다. 경쾌한 울림음이 울리며 영상 하나가 단톡방에 올라왔다. 남편은 두 딸들에게 영상을 자세히 보면 엄마와 아빠가 나온다는 믿지 못 할 말을 남겼다. 처음에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영상 속에, 그것도 함께 나온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영상의 제목은 ‘1983~2000년 **대학교 거리 모음’이었다. 우리가 다니던 대학가의 모습을 시대순으로 담아놓은 영상이었다. 우리가 입학한 연도 영상에 모르는 사이였던 우리가 등장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처음에는 남편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몇 분에 나오는 거냐며 되물었다. 몇 분 즈음이라는 남편의 말에 따라 영상을 조정하고 있을 즈음, 손이 빠른 큰딸이 화면을 캡쳐하여 단톡방에 올렸다. 캡쳐 된 화면을 확대하여 보니 남편인 듯 아닌 듯했다. 스무 살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의상이 꽤 세련됐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느껴지던 센스없는 패션에 비하면 오히려 스무 살의 그가 더 나은 듯했다. 아이들도 아빠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그 장면에 함께 나오는 친구들의 이름까지 대며 스무 살의 자신이 맞다는 각종 증거들을 갖다 대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어디 있단 말인가? 남편의 영상에 거의 연이어 내가 나온다고 했다. 남편이 친구들과 서 있던 자리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길을 친구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짧은 숏컷에 유행하던 브랜드의 점퍼를 입고 있었다. 백팩을 메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모임이 있었던 모양인지 친구와 함께 어느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남편의 영상에서는 뒷모습이 주를 이룬 반면, 나는 클로즈업이 많이 되어 있었고 옆모습이 주를 이루었다. 누가 보기에도 부정할 수 없는 나였다.      


  그 영상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찍힌 것은 아니겠지만 거의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스무 살의 남편과 나라니!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나 영상을 돌려보았다. 마흔이 넘어 오십에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지만 스무 살의 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것 같은데 나이라는 숫자는 저 혼자 널뛰기를 했는지 우리를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만 같았다. 우리는 계속 스무 살인데 저 혼자 달리기를 한 시간의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할 지경이었다.      


  영상을 본 딸들은 스무 살의 내가 귀엽다고 했다. 지금보다 훨씬 생기있고 발랄해 보인다고 했다. 엄마는 늘 대학생 때 공부만 했다고 하더니 그런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고 했다. 스무 살의 엄마가 참 예쁘다고까지 했다. 지금과 많이 다르진 않다는 진실 같은 거짓말도 선물로 안겨주었다.     


  처음에는 그 영상을 보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의 스무 살과 많이 달라서 적잖이 당황했다. 소심함과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나를 대표하던 시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영상 속 나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심리적인 부분이 가려진 채 외적인 것만 보여서 그럴 수도 있다. 당황스러움을 뒤따라 나온 감정은 다행스러움이었다. 기억 속의 나보다 훨씬 행복하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훨씬 더 많이 누렸던 것 같은데 나는 어째서 반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아이러니했다.      


  또 하나 놀랐던 것은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아이스크림이었다. 그 시절에는 용돈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집과 학교가 가까워 도시락을 싸 다니기도 했고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늘 걸어서 맨 꼭대기에 있는 강의실까지 가곤 했었다. 그런데 내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은 하나에 몇 천원을 하는 브랜드 아이스크림이었다. 늘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본 순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누리며 지냈다는 생각이 들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영상 속의 나로부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20년이라고 적으려다가 30년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더 부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숫자로 적고 보면 시간의 거리나 무게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갈수록 많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만 내 나이와 경력이 그 시간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학생이던 나는 직업인이 되었고, 싱글이던 나는 남편을 만나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이것이 받아들여야 할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마음은 이삼십 대인데 어느새 사십 대 중반을 지나고 있다.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던 스무 살의 내가 아닌 발랄하고 통통 튀던 내가 그곳에 살고 있어 다행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갔던 모임에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했을까? 많이 웃었던가?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혼자서 얼굴이 붉어졌을까? 모임이 끝난 후, 집에 가는 길은 어땠을까? 그 시절의 나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때의 너는 행복했냐고.     


  스무 살의 내가 환하게 웃는다. 발걸음에는 활력이 넘친다. 곁에 있는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마주 보고 웃는 모습이 싱그럽다. 열심히 강의를 듣고 시간을 쪼개어 아르바이트를 간다.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때때로 미팅도 하고 동아리며 동문 활동도 기꺼이 경험해 본다. 마흔이 넘은 나를 감히 상상하지 못 하지만 주어진 하루를 성실히 맞이한다. ‘기억’ 폴더에 있던 ‘스무 살’ 파일에 덮어쓰기가 된다. 나의 스무 살이 회색에서 주황으로 바뀐다.     


  너를 다시 만난다면 꼭 안아주고 싶었어.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대신 손을 맞잡고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자.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이곳의 너는 평화롭다고 말해줄게. 그러니 더 많이 웃고, 더 행복하게 지내. 이곳에서 너를 기다릴테니 천천히 와도 괜찮아. 그렇게 웃고 있으면 돼. 고마워! 나의 스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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