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하는 말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아직도 그 캐릭터가 인기인지 모르겠지만 ‘뿡뿡이’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TV에서도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었고 아이들이 타던 장난감 말도 그 캐릭터였다. 딸아이가 아기였을 때 한창 잘 타고 놀던 장난감에서 그 캐릭터의 주제곡이 계속 흘러나왔다. ‘뿡뿡이’가 왜 좋냐고 묻자 ‘그냥 그냥 그냥’이라고 답하는 단순한 가사였다. 젊었던 나는 그 가사가 매우 거슬렸다. 자신의 의견에 대해 적절한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냥’이라는 무책임한 말로 둘러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딸아이는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기였지만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언젠가 나의 질문에도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만 같았다. 십 대 아이들이 어른들이 말만 하면 ‘그냥요’라고 답하는 건 그 노래를 듣고 자라서일지도 모른다며 괜한 노래를 탓하던 철없던 엄마가 나였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인이 되고 두 아이의 부모가 되면서 책임감의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워졌다. 무슨 일이든 내가 기꺼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안 그래도 작은 마음을 더욱 쪼그라들게 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었지만 그 결과 또한 오롯이 내 몫이었다. 학생 신분일 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같은 어른들이 어떤 형태로든 보호해 주었다. 하지만 누구 앞에서나 공평한 시간은 보호받던 나를 보호하는 입장이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교복을 벗으며 자유를 입었을지 모르겠지만 벗어 던진 교복과 함께 사라져버린 보호막들이 아쉬울 때도 있었다.
사회인이 되어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 결정에 대한 합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했다. 왜 그것을 택했는지, 더 나은 선택은 없었는지 계속해서 질문받는 느낌이었다. 직설적으로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말을 풀어보면 그 속에 든 내용은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공문에 근거해서 처리하든, 법에 근거해서 처리하든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이유가 항상 있어야 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치같기도 했지만 나를 옭아매는 것 같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에조차 이유를 찾고 있는 나와 매번 마주해야 했다. 특히 그 일이 여러 사람과 얽혀 있는 경우에는 더 그랬다. 내가 한 결정에 대해 누군가가 손해를 보거나 상처입게 될 수도 있는 경우는 더욱 명확한 이유와 근거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냥’이라는 말을 싫어하던 나는 이제 ‘그냥’이라는 말을 동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에 대해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무책임한 사람쯤으로 치부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항상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저 내 마음이 가는대로 했다는 뜻의 ‘그냥’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순간들이 많이 그립다. 누군가 나에게 왜 그랬냐고 물을 때 그냥 그래봤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굳이 합당한 근거를 대지 않아도 내 마음이 시켜서 그렇게 했다고 서스럼없이 말 할 수 있는 순간을 만나보고 싶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의 MBTI는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세 번이나 MBTI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변함없이 계획형이었다. 업무처리를 할 때는 해야 할 일 목록을 번호대로 작성해야 하고 업무가 끝날 때마다 하나씩 줄을 그어나간다. 모든 업무에 다 줄이 그어지고 나면 짜릿한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무엇이든 미리 준비하고 계획해 두어야 마음이 편했다.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기면 늘 당황했고 그것은 실수로 이어졌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오늘 다 못한 업무는 내일 해야지 하고 미루기도 한다.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들이 쏟아지는 날에는 실수가 없도록 더욱 천천히 시간을 쓸 뿐, 지나치게 당황해하거나 긴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갈 때는 숙소와 대략적인 장소만 정한다. 그마저도 현장에서 바뀌기 일쑤다. 어디서 식사를 할지, 어떤 것을 체험할지는 정하지 않는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대략 정해두었던 곳으로 가기 위해 걷기 시작한다.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그곳에서 시간을 쓰고 싶은 만큼 다 쓴다. 사람들이 꼭 보아야 한다고 하는 명물들을 하나도 보지 않고 오는 경우도 있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나는 그저 마음 뒤편에 서서 따라가기만 한다.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는지에 관해 마음에게 묻지 않는다. 그 순간의 내게 선물을 주듯 마음껏 해 보라고 장(場)을 펼쳐준다. 그것이 비싼 돈을 들여서 간 해외 여행일지라도 마음 뒤에 서서 느긋하게 그저 걸어가는 일을 나에게 기꺼이 허락한다.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마음은 그제서야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뿡뿡이 노래를 들으며 말을 타던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자란 나도 조금은 철든 엄마가 되었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방 같은 하찮은 일에 뾰족하게 화를 내고, 반복되는 잔소리로 서로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이라는 말을 부는 바람을 맞이하듯 자연스럽게 듣는다. 굳이 이유가 없어도 그러고 싶은 마음들이 누구의 가슴에나 고여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도.
가을이다. 무더웠던 여름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바람이 시원하다. 나무는 여름의 푸르름을 잊은 듯 어느새 붉은 살갗을 드러낸다. 시간에 쫓겨 빠르게만 걷던 출근길로 느리게 퇴근한다. 집 앞에 다 왔는데 곧장 들어가지 않고 계속 걷는다. 누군가 다가와 집에 안들어가냐고 물어봐주면 좋겠다. 그러면 마음을 앞세워 뒤따라 걷던 나는 준비해 둔 대답을 꺼내놓아야겠다. ‘그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