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19일차. 이불 밖으로 얼굴을 슬쩍 내밀었더니, 히터로 데워지다가 만 공기가 얼굴에 내려앉는다. 이불 안도 서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불 밖 공기는 더 추웠다. 옆을 돌아보니 연수 일행인 언니 J는 아직 자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이불 안으로 꾸깃꾸깃 몸을 집어넣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이불을 홱 걷어버리고 옷걸이에 널린 수건을 챙겨서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욕실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발바닥을 파고드는 차가움에 놀라 불판 위의 개구리처럼 펄쩍거렸다. 이 집에서 생활한지 벌써 5일이 지났는데도 욕실에서의 아침은 늘 춥고 힘들다. 얼른 수도꼭지를 최대한 뜨거운 방향으로 맞추고 물을 틀어 발바닥을 향해 물을 쐈다. 더운 물에 발을 녹이니정신도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可愛い : 귀엽다
오늘은 근처에 있는 카베중학교에서 일일 중학생 체험을 하는 날이었다. 연수 일행 K가 머물고 있는 집의 딸인 미키가 다니는 중학교. 점심시간에 맞춰서 우리 집에 모인 K와 나, 그리고 언니 J는 직접 만든 각자의 도시락을 들고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앉아계신 이무라 씨는 우리 홈스테이 집 어머님이시다. 오늘은 이무라 씨도 함께 다니면서 중학교 구경을 하게 되었다.
'공사중' 표지판을 지나 달려가는 승합차. 집에서 멀어질수록 마음 속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내가 15살이었을 때는 뭘 했더라. 동아리에 대한 열정이 충만했던 때였던 것 같다. 과학 동아리, 독서토론부, 도서부, 검도부에 후회없이 나를 쏟아 부었던 어린 날들은 지금의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나처럼 한창 반짝거리고 있을 학생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자꾸 들뜨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해 얼른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점심 준비로 바쁜지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2층으로 올라가는 도중, 계단에서 어떤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단정한 흰 셔츠 위에 야무지게 맨 빨간 넥타이가 남색 바지와 참 잘 어울렸다.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본 탓인지 그 아이는 옆에 있던 친구와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2층에 올라가니 복도에서 놀던 학생들이 우릴 보고 흠칫 놀라면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갈라졌다. 표정을 보니 적대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우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몰린 학생들로 가득 찬 복도는 방금 전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안녕하세요, 어디에서 왔어요, 남자친구 있어요, 얘 잘생겼어요못생겼어요 등등 오만가지 질문이 쏟아졌다. 동물원 원숭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관심이 은근 마음에 들었다. 어디에서 또 이런 관심을 받아보겠어. 그때, 학생들 틈을 비집고 나온 미키가 우리를 데리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의 정신없는 분위기 때문에 붕 뜬 기분으로 우리는 반에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교실이었다. 교실 뒤에 나란히 걸린 서예 작품들, 단정한 남색 교복,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과 그 얼굴에 가득한 싱글벙글한 표정. 그냥 이 교실에 있는 모든 게 다 예뻤다. 그리고 미키가 앉으라고 가리킨 책상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헤벌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쓰는 불편하고 딱딱한 일체형 책상과는 다른, 자그마한 나무 책상들이 6개씩 붙어있었다. 미키가 가리킨 자리에 앉아 다른 5명의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도 수줍은 미소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뭔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いただきます : 잘 먹겠습니다
책상에 도시락을 꺼냈더니 한 학생이 일어났다. 차렷, 경례, 이타다키마스. 나도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얄브스름하면서도 가벼운 젓가락으로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다들 묵묵히 밥만 먹었다. 어색함을 못 견딘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았다. 다들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오늘 하루 내 짝이 된 단발머리의 여자아이가 자신의 이름이 나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나를 시작으로 주변의 다른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나도 내 소개를 하자 아이들은 자그마한 입으로 지예, 지예 하면서 내 이름을 외우려고 노력했다.
학생들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천천히 밥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차렷, 경례를 외쳤다. 벌써 점심시간이 끝났나보다. 나는 이제 막 입에 넣으려던 주먹밥 하나를 후다닥 내려놓았다. 그 와중에 그걸 들키고 말았는지 벌떡 일어났던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해주었다. 나는 내려놓은 주먹밥이 부끄러워,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내가 인사를 방해해서 더 미안하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점심 시간을 확인하고 밥을 먹어야겠다.
入学式の準備 : 입학식 준비
점심시간이 끝나고 원래대로 책상을 돌리자, 잠시 뒤 담임 선생님께서 커다란 박스를 들고 돌아오셨다. 상자에는 하늘하늘한 분홍색 종이와 알록달록한 색종이가 들어있었다. 지금부터 4월에 있을 입학식 때 강당에 붙일 장식을 같이 만든다고 했다. 잠시 뒤 두 학생들이 앞에 나와서 어떤 장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회장과 부회장 같은 애들일까. 옆에 앉은 나나에게 물어보니 그렇다고 했다. 하늘하늘한 종이로는 종이꽃을 만들고, 알록달록한 색종이로는 종이 목걸이 모양의 장식을 만드는 것 같았다. 나나는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안에서 플라스틱 상자를 꺼냈다. 딸깍 소리를 내며 열린 투명한 상자 안에는 분홍색 계열의 아기자기한 문구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다. 정말. 귀여웠다. 나도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장식 만들기에 열중했다.
授業 : 수업
쉬는 시간이 끝나자 이동 수업이 있다고 나나가 말해줬다. 실험실에서 무슨 수업을 들을지 두근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전문 용어가 많아서 제대로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과학실로 필기구를 들고 이동했다. 과학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4단 칠판. 한국에 있는 우리 학교 인문대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칠판이라 왠지 탐이 났다. 잠시 뒤 들어온 백발의 남자 선생님은 자신을 기무라 타쿠야라고 소개하며 능글맞은 웃음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4개의 칠판 중 하나에 오늘의 수업 목표를 큼직하게 적으셨다. ‘구름과 안개가 발생하는 조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이후에 우리는 물을 병에 넣고 진공상태로 만들어서 수증기가 발생하게 하는 실험을 했다. 선생님의 말투에 사투리가 조금 섞여있어서 말을 알아들으려면 바짝 집중해야 해서 힘들었지만, 무조건 이론을 주입하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면서 원리를 찾아나가는 형식의 수업이라는 점이 참 좋았다.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과학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라면 나도 다시 과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오늘의 키워드는 구름과 안개라는 말로 수업을 마무리하셨다.
ありがとう : 고마워
수업을 비롯한 오후 일정이 다 끝나고 우리는 다시 교장선생님의 인사를 받으며 학교를 나왔다. 이대로 떠나려니 너무 아쉬웠다. 하루가 아니라 한 일주일 정도 학생들이랑 같이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차에 타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동아리 활동을 하러 가는 학생들이 우리를 보고 다시 우르르르 몰려오는 게 보였다. 학생들은 조심해서 한국까지 잘 돌아가라고 말하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우리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