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을 만큼 20대를 즐길래
그 얘기를 하면서 허허 웃으시는데 그 웃음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조금씩 삐져나와있는 흰머리도 웃음과 함께 들썩였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사람은 지금 살고 있는 시간에 어울리는 모습이 따로 있는 듯했다.
-본문 중-
평일에는 업무 생각을, 주말에는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맛으로 살아가는 요즘.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순간이라는 단어는 내게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시작되는 일과 속, 일상만이 존재할뿐이다. 그 속에서 때때로 치열하게 고민하긴 하지만 결국에 흘러가듯 살아가는 요즘은 순간이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나오는 유퀴즈온더블럭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 편을 리뷰하면서 썼던 글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 프로그램을 자주 챙겨봤다. 이유는 티비 너머로 풍겨오는 사람 냄새가 좋아서였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시민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부터, 시민들에게는 깜짝 선물 같은 시간을 선사하고, 시청자들에게는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몇 안 되는 티비 프로그램. 게다가 유재석이 조세호에게 '자기야'라고 부르며 핀잔 아닌 핀잔을 하는 포인트나 고퀄리티의 먹방까지.
티비 너머지만, 내 주변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연스럽게 내 삶과 연관 지어볼 수밖에 없었다. 유퀴즈온더블럭을 보며 내 삶도 좀 돌아보게 되었는지, 1년 전에 쓰인 글에는 당시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기억이나 향수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고, 순식간에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고, 내가 쓴 글을 읽다 보면 어떨 땐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이번 글을 읽는 동안 그때 했던 생각들이 다시 떠올라서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살짝 잊고 있던 기억들을 다시 상기시키고자 한번 더 써보기로 했다.
순간의 유효기간에 대해 깨달았던 스물넷의 글
유퀴즈온더블럭 17화, 문구점 사장님 편이었다. 이번 편 인터뷰는 펜과 필통, 공책들이 즐비한 문구점 통로에 옹기종기 앉은 채로 진행됐다. 다소 비좁아보였지만 옹기종기한 모습이 귀여웠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해보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50대인 사장님께서는 10대부터, 20대, 30대, 40대로 나누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50년의 세월을 몇 마디로 정리하니 기분이 참 묘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사장님의 말을 들었다.
기억에 남는 단어가 있었는데,
"아등바등"이라는 단어다.
10대와 20대를 말하는 사장님의 한마디에는 아등바등이라는 단어가 끼여있었다. 30대, 40대에도 나태했던 자신이 아니라 악착같이 살았던 자신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사장님에게는 그렇게 살았던 지난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으로 웃을 수 있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사장님께서 20대를 아등바등이란 단어로 기억하는 데에는 그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사랑도, 사람도, 웃음도, 슬픔도 딱 20대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을 텐데.
그 얘기를 하면서 허허 웃으시는데 그 웃음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조금씩 삐져나와있는 흰머리도 웃음과 함께 들썩였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사람은 지금 살고 있는 시간에 어울리는 모습이 따로 있는 듯했다. 애써 주름을 지우고, 세월을 거스르려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웃고 계시는 사장님의 모습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누가 보면 겨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24살인 나도 죽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서 내가 쓸모없는 것 같이 느껴지던 그런 시간 동안, 나만 힘든 건가 싶은 마음에 억울함과 슬픔이 깊어지기도 했고 미래가 없는 불안감에 짓눌려서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문구점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감정도 어쩌면 24살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겠구나. 당시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지금은 또 이렇게 웃고 있으며 고통받던 시간을 묶어서 skip 버튼을 눌렀다면 아마 지금의 내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게 돌아오지 않는 만큼 소중하다는 사실은 이미 나를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비인형을 갖고 놀던 시절, 골목길에서 땅따먹기를 하던 시절, 집전화기로 친구 집에 전화를 걸던 시절, 절친한 친구랑 공유 일기를 쓰던 시절,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 타기에 성공하던 시절, 첫사랑을 만났던 시절.
다시 바비인형을 갖고 놀래야 흥미롭지 않을 테고, 이제는 집전화기로 전화를 걸어 "안녕하세요, 경아 친구 남경인데요. 경아 혹시 집에..." 공손하게 말을 걸일 도 없을 것이다.
모든 감정에는 유효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이젠 슬픈 것도, 행복한 것도, 기쁜 것도 24살의 나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기록하며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20대 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누리고 30대가 되고 싶다. 밤새 술을 먹는 것도, 계획 없이 떠나는 것도, 불안한 미래에 고민하는 것도 어쩌면 이때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새로운 맛이 많고, 새로운 곳이 많고, 새로운 사람도 많고, 새롭게 느끼는 감정들도 많아서 그만큼 20대는 더욱 열정 넘치기도 하고 때로는 더 아프기도 하는 거니까.
남은 20대 동안 나의 미션은, 나에게 닥치는 모든 시간들을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내가 50대가 되어서 20대를 되돌아봤을 땐 후회 없을 만큼 20대를 즐겼다 라고 말할 수 있게.
P.S. 1년 전과는 또 다른 상황 속에 있는 나를 빚 대어가며 글을 읽었다.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이 글은 나에게 와서 온전히 닿았다. '모든 감정에는 유효한 시절이 있다'는 말은 어쩌면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