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고 온천 여행
몇 해 전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를 몇 달이고 붙들고 있다가 결국 완독을 하지 못하고 책장에 쑤셔 넣어버린 적이 있다. 그전에 읽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도 <마음>에도 그리 빠져들진 못했다. 겨울이 가기 전에 온천물에 몸을 담구고 쉬다 오고 싶은 마음에 마쓰야마행 비행기를 끊고 <도련님>을 읽기 시작하며 나는 나쓰메 소세키란 소설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쓰는 작가였구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손해만 봐왔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 2층에서 뛰어내리다 허리를 삐는 바람에 일주일쯤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의 시작
<도련님>은 도쿄 출신의 주인공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장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시코쿠에 있는 중학교에 수학교사로 가게 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도 신뢰를 받지 못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형과도 사이가 좋지 못한 사고뭉치 독불장군 성격의 인물. 그 와중에 그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주는 사람이 있는데, 집안일을 해주는 하녀 기요 할멈이다. 소설 속에서 이 기요 할멈이 여느 등장 인물보다 중요한 역할하기에 소설의 제목도 기요의 관점에서 주인공을 칭하는 명칭인 봇짱(우리말로 도련님)이다. 기요는 주인공을 끔찍이 귀여워하며 다른 식구들 몰래 맛있는 것과 용돈을 챙겨줄 뿐만 아니라 늘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봇짱은 시코쿠로 부임하게 되며 피붙이 가족보다 더 가까운 기요 할멈과 떨어져 지내게 되며 크게 상심하고 편지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으며 할멈을 무척이나 그리워한다.
마쓰야마 공항에 도착하니,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도고온천행 무료 셔틀버스도 준비되어 있고 마쓰야마에서 즐길 수 있는 대부분의 명소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쿠폰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자비로운 도시가 있나. 에히메 한국 경제관광교류 추진 협의회는 기요 할멈인가..? 평소 과일주스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편이 공항에 있는 수도꼭지 주스를 쉽사리 지나칠 리 없다. 수도꼭지 앞에서 한참 고민하더니, 이건 나중에 마시고(결국 마쓰야마성에서 더 비싼 가격을 주고 마시고는 "역시 착즙 주스만은 못 하군. 평범해"란다. 봇짱이 따로 없다.) 착즙기로 짜주는 귤 주스부터 마셔보겠단다. 에히메는 이 지역에서만 키우는 귤 종류가 40종이 넘어 연중 내내 귤이 나는 귤 산지로 유명한 지역. 수도꼭지 주스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그 동네는 수도꼭지 틀면 귤 주스 나오지 않냐? 귤밖에 없는 동네 아니냐?라며 놀림감 소재를 삼은 것을 실제로 상품화해 버린 것! 수도꼭지 주스 대신 100엔을 더 주고 선택한 오늘의 착즙 주스는 이시마루농원이라는 곳의 이요칸(伊予柑)이란 품종. 1월부터 3월까지가 제철이라고 하는데, 설탕이나 시럽 같은 첨가물을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귤 몇 개를 짜내기만 한 주스인데 설탕을 듬뿍 넣은 것 마냥 달콤하고 맛있었다. 향도 상큼하여 비타민을 듬뿍 충전하고 여행을 시작한다.
<도련님>의 주인공은 마쓰야마 시내에서 하숙을 하며 저녁마다 빨간색 수건을 들고 전차를 타고 도고온천에 가서 온천욕을 즐기는데, 워낙 고집불통에 사고뭉치인 성격인지라 학교에서 당직을 서라고 하는 날에도 온천을 다녀왔다가 교장선생님께 꾸중을 듣기도 한다. 소설에서는 도고란 이름 대신 ‘스미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마쓰야마 시내에서 전차로 가면 10분, 걸어서도 30분 정도이고, 공원과 유곽(지금은 맛집 거리려나)도 있고 주인공이 좋아하는 당고(경단) 가게도 있다고 그려진 소설 속 묘사가 지금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렇게 현실감 있게 그려져 있는 데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 본인이 실제로 1895년에 마쓰야마 중학교에 영어선생님으로 가서 당시 개축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고온천을 즐겼기 때문이다.
“도고온천은 매우 훌륭한 건물로 8 전만 내면 3층에 올라가서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고, 온천에 들어가면 머리까지 비누로 감겨주어, 꽤 오래 머물고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도고온천 역 주변은 관광객들로 조금 북적이긴 했지만 료칸을 향해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인적이 드문드문 해지고 그나마 마주치는 사람들도 유카타를 입고 사뿐사뿐 걸으며 산책하고 휴식을 즐기는 이들뿐이라 차분한 마을의 분위기가 좋았다. 우리도 온천욕과 료칸의 식사를 충분히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지난 몇 해간 홋카이도 가이드북 작업을 하느라 여행을 가도 좀처럼 맘 놓고 쉬는 여행은 하지 못했다. 모처럼 쉬기만 해도 되는 여행이니 몸과 마음을 충분히 녹여내기로.
소설 속 도련님은 완고한 성격으로 인해 학교에서도 하숙집에서도 좀처럼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덴푸라메밀국수를 좋아해서 가게에 들어가 네 그릇이나 비우고 나면 다음날 칠판에 학생들이 칠판에 ‘덴푸라 선생’이라 적어두질 않나, 경단을 먹고 오면 “경단 두 접시 7 전”이라 써두어 주인공의 심기를 건드린다. 심지어 교장선생님으로부터는 메밀국수와 당고를 즐기는 건 상스러운 행동이라며 자제해 달란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또 학교 숙직실에서는 기숙사 학생들이 이불 밑에 메뚜기를 깔아 두어 잠을 못 이루기도 한다. 선생님들과도 갈등이 많아 싸움도 잦다. 하숙집 주인들에게도 불만이 많다. 어떻게 보면 사회 부적응자 같지만 정의롭고 당당해 밉지 않은 캐릭터인 봇짱. 그 역시 늘 예민하고 날 선 하루하루를 이곳 온천에서 풀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났다.
마쓰야마는 길을 걷다 보면 벌써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한 성격 급한 꽃나무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봄이 시작되어 포근하긴 했지만 머무는 내내 흐린 날씨여서 조금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떠날 때가 되니 파란 하늘로 뒤덮인 온천마을의 아침이 밝았다. 이 풍경으로 마을을 기억하고 싶어 아침 온천욕을 하기 전 산책에 나섰다. 도고공원은 밖에서 볼 때보단 규모가 꽤 큰 공원이었다. 공원을 한 바퀴 정도 돌아본 후 마을 구석구석을 걸었다. 등교 시간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학생들 혹은 소설 속 도련님을 괴롭힌 학생들이 입었을 법한 옛날 디자인의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이 마을. 쉬러 또다시 찾아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