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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감사

박하일기 9.9

by 박하

초보운전 스티커를 트렁크 양쪽에 보란 듯이 붙여 놓고 나름 안전하게 운전하는 차남.

등교 시간과 나의 수영 시간이 맞물려 자연스럽게 내가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수영은 늘 발차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지만 나름 유산소를 열심히 한 듯하여 컨디션은 좋았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대형 슈퍼마켓이 등장하는데 지나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알배추 2통, 사각 어묵, 가지, 마늘종을 샀다.

공복이라 배가 고파 손이 떨렸고 나가기 전 냉동실에서 꺼내놓은 베이글을 커피와 마셨다.

얼마 전 옆집에서 주신 냉동딸기가 전혀 소진되지 않아 부피만 차지하길래 잼을 만들었다.

약불에서 오래 끓이고 계속 저어줘야 하는 조리법이라 조금 성가시지만 맛은 비교불가다.

가스레인지 상판에 마구 튄 잼 덕분에 주방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는 쾌거도 이뤘다.

알배추를 잘라 소금에 절이고 주말에 사놓은 조선부추도 다듬었다.

겉절이가 완성되었다.

가지는 보통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쫄깃하게 버무리지만 물컹한 가지나물이 먹고 싶어 전자레인지를 이용했다.

어묵은 큼직큼직 썰어 간장 양념에 볶아 냈다.

마늘종은 협찬받은 무쇠냄비 촬영 때 필요한 식재료라 쟁여 두기로 했다.

잔멸치도 볶았더니 어느새 반찬 4가지가 완성되었다.

부엌에 있는 내내 라디오를 들으며 중간중간 꺼내놓은 책도 좀 읽을 수 있는 여유를 느꼈다.

한꺼번에 4가지 반찬에 딸기잼까지 하며 어떻게 책을 읽을까 싶겠지만 주부생활 25년 차가 되면 가능한 일이다.

순간, 감사가 요동쳤다.

절친에게 톡을 보냈다.

'집순이 맞나 봐. 누구도 나한테 톡 한 줄 보내지 않은 날이지만 나 지금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

오후가 되어 멋지게 귀가한 차남에게 닭봉 구이를 보태 이른 저녁을 차려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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