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점수는요!
세계여행 시작 후 첫 번째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중간점검을 해봤습니다. 다만, 아이에게 생긴 변화는 따로 정리 예정입니다. 물론 이 변화의 원인 중 일정 부분은 해외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머지는 가족 구성원 전부 매인 곳 없이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정말 압도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가족 내 대화가 증가했습니다. 일단 한국과 다르게 세끼 식사를 같이 하다 보니 그만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그 외에도 손 잡고 길을 걷거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소소하게 나누는 대화도 많아졌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좋은 풍경에 녹아들어 하염없이 펼쳐진 바다나 그림 같은 집이 곳곳에 위치한 지역을 보면서 가만히 앉아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관광객들과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니 대화가 술술 나오더군요.
그리고 집에 와서 하루를 정리하고 누워 잠들기 전에도 왠지 모르게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고 웃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떠나길 참 잘했다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외에 나와서는 24시간 함께 붙어있습니다.(아이와 24시간 붙어있는 것에 대한 글도 나중에 따로 쓰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여행을 같이 다니고, 밥도 같이 먹고, 안전을 위해 가까운 곳을 방문해도 다 같이 움직입니다.
한국에서는 늘 쓰윽(SSG) 배달시키던 장거리도 이틀에 한 번은 직접 대형마트에 가서 골라오게 됩니다. 제가 어릴 때 얼마나 마트 장 보는 것을 좋아했었는지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집에 있어도 각자 방이 있기 때문에 붙어 있다는 느낌이 덜했는데, 이곳에서는 넓어봤자 방 하나기 때문에 함께하는 느낌 자체가 강해졌습니다.
어쩌면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던 가족 간의 끈을 다시 꽉 동여매는 느낌이어서 힘들기도 했지만 기분 좋았습니다. 떠나지 않고 그대로 지냈다면, 점점 느슨해져서 어느 순간 '그냥' 살고 있는 모습일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 여행지에서는 꼭 해야 할 일들이 있고 다들 회사나 학교에 매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역할 분배를 더 많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정해진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나 특정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함께 해결하는 유기체 같은 역할 분배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행계획을 짜고 있을 때 와이프가 요리를 하면 아이가 바닥을 닦고, 와이프가 빨래 정리를 하면 제가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일기를 쓰는 식이었습니다. 밖에서 제가 무언가 검색하거나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면 와이프가 제 뒤를 가리고 아이가 미어캣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역할이었습니다.
무언가를 가족이 함께 헤쳐나간다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로서 가지고 있던 '내가 책임져야지'라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나누니 더 민첩해지고 든든한 느낌이었습니다.
- 원래 와이프는 카톡 같은 개인 메신저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고 저는 회사 업무나 급한 연락이 올까 봐 핸드폰을 끼고 사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올 때 유심을 사서 이용하면서 데이터는 쓸 수 있지만 서로에게만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연락 없이 여행을 다니다 보니 조금 시간이 나는 날에도 한국에서만큼 카톡을 보지 않게 되더군요. 특히 저 같은 경우는 원래 핸드폰에 연락 오는 것을 조금 스트레스로 여기던 사람이라 폰을 밖에 나갈 때만 보게 되었습니다.(구글 지도는 소중하니까요)
대신 그 시간에 위에 말한 대화를 더 하거나 각자의 기록이나 발전적인 콘텐츠 제작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책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는 종이책의 질감과 느낌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곳에서는 전자책만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 한국에서 생활할 때는 가끔씩 중요한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리적으로 진짜 '시간'이 없다는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생각할 에너지'를 가진 채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면 보통 아이가 금방 일어나곤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오면 해야 할 집안일도 있었고 씻고 나면 거의 자기 전 시간이기 때문에 녹초인 상태였습니다. 주말에 날씨가 좋으면 가족과 나들이도 가야 했고, 날씨가 좋지 않으면 집 안에서 아이와 놀아주고 밀린 집안일을 하는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시간을 내서 생각을 하더라도 정말 혼자서 멀리 산이나 바다로 떠나는 것이 아니면 주변에 집중을 끊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남프랑스 바닷가에서 햇살을 맞으며 저는 생각하고, 아이는 파도와 함께 놀고, 와이프는 생각하기도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단기 여행으로 왔으면 저는 절대 그렇게 시간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제 이전 글을 읽으셨던 분이라면 제가 여유롭기 때문에 세계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지금도 있는 돈을 까먹으면서 여행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조차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모습인지, 내가 그리는 노후의 모습은 어떤지.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내 아이가 살았으면 하는 곳은 어디인지.
매일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한국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입시에 치이고, 취업에 치이면서 꿈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제가 좋아하는 것조차 아무리 생각해서 찾기 쉽지가 않습니다. 취미 정도는 있지만 정말 잠을 깨면서까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 있을지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서 아이에게는 더 일찍 꿈을 찾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도 매일 하고 있습니다.
- 매일 생각을 하다 보면 한국살이에 대한 회의감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 정도 되는 나라에 태어나 자란 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세대의 고생 위에 행복한 인프라를 누렸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몇 가지 측면을 생각할 때 외국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단 가장 큰 것은 미세먼지입니다. 미세먼지가 없는 곳에서 생활하니 많은 질병이 완화되었습니다. 가장 심했던 비염부터 시작해서 안구건조증, 두통 등 말입니다.
날씨만 봐도 사계절이 뚜렷했던 한국은 사라지고 있고 가장 청명한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그 시기조차 미세먼지로 덮이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아직 날씨가 쾌청하고 청명한 나라에서는 날씨의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이를 위한 교육제도, 안 그래도 좁은 땅에 수도권에 엄청나게 밀집된 인구, 노후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선택에는 장단점이 있을 듯합니다. 돌아갈 때까지 계속할 고민일 듯합니다.
- 아직 명확하게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지만, 글 쓰기는 평생 함께 해야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의 기록을 남기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브런치/블로그/개인 소설 등을 매일 쓰고 있고, 와이프도 블로그와 유튜브에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봐서인지 아이는 매일 일기를 쓰면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희가 쓴 기록들이 하나의 책이나 동화 아니면 콘텐츠로 재생산되어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매일 글 쓰는 것을 습관화하고 있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날은 매일 글 쓰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글을 씁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