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많은 나라를 방문했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봤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10살 아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적어보려고 합니다. 이 변화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어나는 성장일 수도 있고, 세계여행을 경험하면서 생긴 변화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아이의 변화는 늘 신비로운 것 같습니다.
1. 매일 쓰는 일기
한국에서도 가끔 일기는 썼지만, 대충 쓰거나 기억 안 난다고 하면서 내팽개치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여행을 하면서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일기를 쓰기만 해도 정말 기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그냥 일기를 쓰는 것이 지루할 때는 마치 뉴스 속보를 하듯 일기를 적기도 하더군요. 무언가를 즐겁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제 역할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우선 세계여행을 하면서 다른 공부는 몰라도 일기는 무조건 쓰기로 약속하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일기를 쓰지 않는 것에 대한 타협은 없었습니다. 가끔 정말 늦게 일정이 끝날 경우는 미리 약속을 하고 다음 날에 무조건 썼습니다.
또 하나는 단계별 업그레이드를 시켜준 것입니다. 아이가 처음부터 일기를 매일 쓰면 힘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쓸 때는 대충이라도 반쪽을 채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반쪽으로 쓰고 그 후 한쪽으로 늘렸습니다. 한쪽에서 그림일기 한쪽이 추가되었고, 그 후에는 일기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몇 가지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조건이지만, 단계별로 해보니 이젠 알아서 잘 쓰고 있습니다.
오히려 일기를 빨리 쓰고 자기가 원하는 놀이를 하거나 부모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에 꽤 놀랐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은 휘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주기 위해 일기를 쓰게 했는데, 아이들은 늘 기대 이상으로 빨리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얻은 언어구사력과 표현력 강화는 덤이었습니다.
2.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대한 관심
저희가 지나온 나라는 크게 네 가지 언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아이가 영어는 조금 하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언어권에서 여행할 때 상대가 영어를 하지 못하면 조금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회화를 배울 수 있는 무료 학습 앱을 깔아줬더니 혼자서 계속 중얼거리더군요.
그리고 어느 날 프랑스 빵집에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주인분과 (아주 간단한) 회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카드로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너무 맛있어요. 이 정도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아이가 새로운 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어릴 때 연수를 보내시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급 이해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터번을 쓰는 사람들, 히잡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왜 그런 건지 묻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천천히 설명해 주니 그런 문화가 한국과는 왜 다른지까지 질문이 나오더군요. 자연스럽게 세계사 공부로 이어졌습니다.(만화로 보는 세계사도 은근히 재미있더군요)
짧은 한두 달 정도로 언어가 유창해질 수는 없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갔을 때가 기대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반대로 외국에 퍼진 한국 문화와 위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니스 카니발에서 흘러나온 강남스타일에 그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습니다. :)
3.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
살기 좋은 나라 위주로 가다 보니 사람들이 대부분 매너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매너라는 것이 사실 말로 풀거나, 특정한 행동으로 나열하기 힘든 문화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걸어 다니는 교습재분들 덕분에 아이가 매너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자기 또래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많이 변화했습니다. 하루는 백화점 문을 잡아주는 아이를 보더니 자기도 그렇게 행동해야겠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도 문 잡아주시는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유럽 쪽에서는 한참 떨어진(체감상 5~6초) 곳에서 오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문을 잡아주고 인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마트에서 장거리를 들고 걸어가는데 아이가 한참 안 따라오길래 돌아봤더니 마트에서 나오는 할머니를 위해 문을 오랫동안 잡아드리고 있더군요. 그리고 할머니와 인사까지 하고 저에게 뛰어오는데 정말 벅찬 기분이었습니다. 자신이 잘한 것에 대해서 고주알미주알 말하는데 그 모습조차 사랑스럽더군요. 저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다른 좋은 사례를 보고 배워서 고마웠습니다.(아직 공공장소에서 작게 말하는 것은 연습이 조금 더 필요한 듯합니다 ㅠ.ㅠ)
4.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한다
세계여행 중 식탁에 앉아서 가족끼리 이야기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아이에게 해외에 나가면 엄마, 아빠가 신경 쓸 일이 많으니 너도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저희가 하는 것을 방해만 하지 않아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떠났던 것이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특별한 역할을 맡은 것이 기쁜지 점점 하는 일을 늘려갔습니다.
1) 아침에 시리얼이나 빵, 과일 등으로 아침을 차리기
2) 나가고 들어올 때 신발 정리하기
3) 바닥 청소하기
4) 빨래 널기
5) 분리수거 같이 하기
6) 설거지하기(아직은 실패... 물홍수)
7) 밖에서 아빠가 길 찾을 때 주변 경계하기
8) 엄마 발 아플 때 안마하기 등
물론 매일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진짜 일 인분 이상을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집안일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공부도 분량을 알아서 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물론 부모가 원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혼자서 정해서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엄마, 아빠가 새로운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할 일을 찾는 모습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5. 부모는 아이의 거울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그 비율이 계속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었습니다. 5살 전까지는 부모의 비중이 100%였다면, 어린이집을 보내면서 80% 정도로 줄어든 듯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선생님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60% 정도로 준 듯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부모와 붙어있는 시간이 줄고, 저희도 예전처럼 아이에게만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더욱 그런 것 같았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 제가 결심했던 3가지 중 하나가 무조건 아이에게 본을 보여주자는 것이었고 다행히 지금까지는 실행하고 있지만, 함께하는 시간 자체가 줄어들면 아무리 본을 보여줘도 엇나가는 부분이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여행을 떠난 큰 이유 중에 하나도 아이와 이렇게 오래 붙어있을 수 있고, 아이가 붙어있고 싶어 하는 시기가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태도나 행동이 훨씬 주체적이고 배려심 깊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행동하고, 혼나서 슬플 때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버려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회의해서 정한 규칙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오히려 스스로 혼자 자는 날을 정하는 모습도 보여줬습니다.
세 명이서 대화할 때 다른 사람의 말을 먼저 듣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연습을 하고 있고, 예전에는 자기 이야기를 안 들어주면 삐지던 모습에서 엄마, 아빠가 이야기하는 주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억했다가 질문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물관/미술관에서 혼자 관람을 즐기는 방법을 배웠고, 작품을 본 후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해서 이야기해주기도 합니다.
그런 좋은 변화를 이끌어내기위해 말로 지침을 정한 것이 아니라 회의를 통해서 합의하고 본을 보여준 것이 조금씩 영향을 주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감동스러운 순간은 아이가 놀이터 그물그네에 누워서 하늘을 감탄하며 지켜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멋진 자연경관을 보면서 몇 시간씩 멍하게 앉아있거나 생각하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하긴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늘 놀이터에서 놀거나 다른 아이들을 쳐다보던 아이가 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너무 감동했습니다.
6. 자아의 성장
아마 세계여행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이 많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싶어 앱을 다운로드하고, 오늘 여행하는 관람지에 대한 정보를 구글맵을 통해 찾아보기도 합니다. 심지어 리뷰까지 남기더군요.
새로운 여행지에 갈 때마다 미리 찾아보고 가고 싶은 지역이나 명소를 말하기도 하고, 먹어보고 싶은 음식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원하는 것은 있었지만, 한정적이었습니다. 근데 많은 것을 보고 배우니 원하는 것도 다양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공원에서 멋지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배워보고 싶다고 하고, 빈에서 멋진 거리 공연을 본 후 악기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적성을 찾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 자신도 적성을 찾아야겠다고 하고, 비행기 접는 법을 유튜브로 검색해서 종이접기 프로의 연봉을 저희에게 알려주기도 합니다.
아이가 쑥쑥 자라는 시점에 제가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세계여행이 채워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아직 자라는 중이기 때문에 떼를 쓰기도 하고 울 때도 많습니다. 아직은 엄마, 아빠의 사랑을 갈구하고 길가에 지나가는 인형 같이 생긴 유럽 아이에 대한 칭찬을 질투하기도 합니다.
백조와 오리에게 빵을 주고 싶어서 매일 가방에 빵을 챙겨 다니고,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경험 위주로 하자는 부모의 의견을 존중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놀이공원에서 새로운 기구를 못 탄다고 속상해하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가서 아는 말을 뱉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다가 감정이입해서 이별하는 사람이 불쌍하다고 울기도 합니다.
10년 뒤 이 글을 읽은 아이가 정말 감사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앞으로도 아이에게 많은 경험을 제공해 주고 꿈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길 희망하며 글을 마무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