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릇-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연어만이 아니다
국제 이사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까다로웠다. 한 컨테이너가 다 차야 움직인다고 했다. 우리 짐은 단출했기 때문에 접시 몇 장, 종지 몇 개 정도 더 들어갈 자리는 충분했다. 금액은 정해져 있으니 최대한 많이 쑤셔 넣는 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1초의 고민도 없이 ‘노리다케’ 그릇은 직접 운반하겠다고 했다. 일본에서 4년 반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귀국 이사를 준비하며 겪은 일이다.
노리다케는 우리나라의 ‘한국도자기’ 같은 도자기 브랜드 중 하나다. 유독 노리다케가 한국 주부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바로 홍차 잔 때문이다. 홍차 잔은 커피잔과 다르게 입구가 넓게 퍼져있고 잔의 내부는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검은색 커피에 반해 투명하고 맑은 갈색을 띠는 홍차가 홍차 잔에 담기면 맑고 부드러운 갈색 액체 밑으로 아름다운 그림들이 비친다. 홍차의 향기에 취하고 맛을 보며 한 번, 홍차에 비추어진 잔잔한 꽃들을 감상하며 한 번. 홍차를 두 번 즐기는 것이다. 그릇 보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 있었지만, 아직 가지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기에 노리다케 홍차 잔에 홍차를 내어 주는 카페에 가서 즐기는 정도였다.
귀국하기 1년 정도 전부터 우리나라의 대규모 아웃렛 같은 곳을 알게 되었다. 요트장을 끼고 들어선 아웃렛을 남편과 나는 나들이 겸해서 자주 갔다. 딱히 무언가를 사기보다는 야외에 온 느낌이 좋았다. 갑갑한 도시의 빌딩 숲에 있다가 넓게 펼쳐진 바다와 서구적인 아웃렛 건물들이 낮게 늘어서 있고 여유롭지만 활기차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속이 탁 트였다. 우리는 정작 거기 가서 눈으로만 쇼핑했다. 비싸니까. 일본 물가에 적응을 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고가의 것들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만 그릇 매장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도 그 유명한 노.리.다.케. ‘어머! 이건 사야 해!’라고 말하며 달려간 곳에는 물론 예의 홍차 잔도 즐비했다. 하지만 비쌌다. 아쉬운 마음에 눈을 돌렸더니 넓은 테이블 위에 노리다케 생활 자기 라인인 ‘로얄 오차드’를 가득가득 쌓아 놓고 대폭 할인을 하고 있었다.
“우리 한국 들어가면 어차피 그릇이 필요하잖아. 이거 억수로 싸게 파니까 여기서 사가자. 이거 진짜 유명한 거데이~. 노리다케다, 노리다케. 얼마나 유명한 건지 아나~”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영업했다. 남편도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 연애 시절부터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노리다케라는 브랜드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의 원산지에서 아주 저렴하게 판다는데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근데 이거 나중에 한국 갈 때 어떻게 들고 가지? 깨질 건데.”
“걱정 마라. 내가 ‘이고 지고’서라도 가져가면 되지.”
역시 믿음직한 내 남편. 둘은 기분 좋게 주워 담았다. 접시는 크기 별로, 한국식 반찬을 담기 딱 적당한 크기의 찬기와 넓고 옴폭해 국물이 자작자작한 조림을 담기에 적당한 수프 볼까지. 차가 없던 우리는 신문지에 하나하나 싼 그릇들을 양손에 들고 전철을 몇 번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거운지도 모르고 그저 신나기만 했다. 그게 귀국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늘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살겠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그때 나는 멸치 육수를 진하게 우려낸 잔치국수가 그렇게도 먹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서 소울푸드는 무엇일까, 엄마의 맛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거기서 답을 찾았다. 고작 잔치국수 하나가 너무 먹고 싶어서 간장과 가쓰오부시 육수 냄새가 나는 일본의 거리가 싫었던 적도 있다.
당시의 우리는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아무리 말이 통하고 우리나라보다 발전했다고 해도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땅에 발이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내 땅에 내 발을 딱 붙이고 살고 싶었다. 정착하고 싶었다. 하루빨리 자리 잡고 싶었고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만 가면 내가 하려고 하는 일도, 남편의 일도 척척 진행될 줄 알았다.
매일 남편과 한국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며 지냈다. 세계의 모든 것이 모여 있는 도쿄였기에 우리의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다. 무언가 조화롭지 않은 소품들을 기념이라며 잔뜩 사 모았고 그것들을 어디에 진열할지 꿈꾸곤 했다. 노리다케 그릇도 그런 맥락의 것들이었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이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나 땅에 발을 딱 붙이고 뿌리내리고 살 곳에서 쓸 내 물건.
드디어 귀국하는 날, 국제 이사를 맡기고 남은 트렁크 두 개와 백팩들. 큰 트렁크에는 당장 필요한 옷가지와 생필품들이 들어있고 작은 트렁크에는 그동안 수집해 놓은 그릇들과 깨지면 안 되는 귀중품들을 담았다(유학생에게 귀중품이란 별거 없지만). 남편은 ‘이고 지고’의 약속대로 그릇이 든 트렁크를 소중하게 운반했다. 나는 덜렁이라 깨지지 않게 운반할 자신이 없었다. 깨진 그릇이 나오더라도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나는 무조건 그릇이 든 트렁크를 남편에게 맡겼다. 바로 그 안에는 나의 소중한 노리다케 로열 오차드가 들어있었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아침 일찍 움직여야 했다. 공항 철도를 타기 위해 우리는 악명 높은 도쿄의 지옥 출근 시간을 거슬러 가야 했다. 출근 시간대에는 모든 에스컬레이터를 한 방향으로 바꿔 놓았고 그 당시 도쿄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도 많았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계단으로 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역무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엘리베이터가 없냐고. 역무원은 1초의 망설임 없이 우리에게 아주 미안해하며, 똑같은 검정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밀려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를 세우고 우리 부부 두 사람만 올라갈 수 있게 방향을 바꾸어 주었다. 그 주위로 몇 명의 역무원들이 밀려드는 회사원들을 막고 있었다. 따가운 시선이었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지 모를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물론 대부분은 휴대폰을 보며 에스컬레이터가 다시 방향을 바꾸기를 무료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출근 시간에 쫓겼을 다수가 소수를 위해 배려해 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일본에서 살면서 가장 감동받은 일 중 하나이다. 얼른 탈출하고 싶었던 그곳에서, 그것도 일본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귀국하는 날. 여전히 일본과의 관계는 속이 상할 정도로 껄끄럽고 풀리지 않은 일 투성이지만 사람의 감정은 또 솔직한 거니까. 감동은 감동이다.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지옥의 출근길을 우리는 거슬러 올라갔고 무사히 공항 철도를 타고 공항에 갈 수 있었다. 물론 공항에서도 그릇이 든 트렁크는 수하물로 부치지 않고 가지고 다니며 기내 반입으로 소중히 지켜냈다. 그렇게 엄마와 형님이 주신 코렐 그릇들과 함께 내 찬장에 조심조심 자리를 잡았다. 별로 비싸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지만 그때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들 중 제일 좋은 것들이었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음식을 담아 슬며시 꺼내 놓으며 “이 접시가 말이야~ ”로 시작하는 기나긴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듣는 사람은 곤욕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세상 풍파 다 겪은 신나는 모험담이었다. 그러나 그땐 이미 영국 웨지우드사의 ‘보타닉 가든’이 주부들의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보타닉 가든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것은 아닌 내 노리다케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구입할 때부터 내 찬장에 들여놓을 때까지, 작은 크랙이라도 날까 애지중지 여긴 귀하신 몸이 지금은 접시 세 장, 찬기 두어 개 남았다. 이 그릇을 사던 날의 날씨, 바람을 기억한다. 청명한 여름날, 아직은 해가 쨍쨍 내리쬐는 오후였다. 머리를 살짝 날리는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고, 햇빛에 눈이 부셔 살짝 찌푸리기도 했다. 눈이 가는 곳마다 온통 반짝이던 날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그릇을 얻은 날의 기억은 생생할까. 내가 돌아가 터 잡고 살아내야 할 곳을 위해 장만한 그릇은 더 각별해서였을까. 그때 그 알 수 없는 몽글몽글함이 지금도 몇 안 남은 그것들을 보면 되살아난다. 다른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면, 냄새를 맡으면, 소리를 들으면 관련된 어떤 일이 영화처럼 떠오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릇을 볼 때 그렇다. 박연준 시인의 말처럼 사정없이 나를 ‘그 시간 속’으로 질질 끌고 가는 타임머신. 짝이 맞지 않지만, 여전히 나는 그 그릇들을 제일선에 두고 하루에 한 번 이상 쓰고 있다. 억척스럽게 지켜낸 노리다케 접시에는 나만 가지고 있는 풍경이 있다. 다시 볼 수 없는 그때 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