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여행만에 알게된 사실.
여행이라 하면, 새로운 것을 보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1분1초를 아껴써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의 여행계획은 여행 전/중/후로 나뉘었다. 교통을 고려한 호텔 검색을 기반으로 랜드마크와 로컬의 비율을 적절히 둔 1시간 단위의 여행 계획표. 현지에서는 아침 7시 조식을 시작으로 야경사진까지 찍는 스케줄로 이럴꺼면 굳이 좋은 호텔을 예약할 필요도 없지 않았나 하는 후회를 하며, 돌아와서는 다녀온 스팟 단위로 정리해서 블로그 포스팅. 전투적으로 여행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기회비용에 대한 보상심리(?) 였던 것 같다. 그 땐 휴양지는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바다가 펼쳐진 휴양지에서 무엇을 할지 무엇을 볼 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새로운 경험도 없고 놀다 먹고 오는 것이 무슨 여행으로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여곡절끝에 보라카이 여행은 시작되었다. 보라카이 여행이 대중화 되어 불편한 교통편도 많이 해소 되었지만, 다른 여행지에 비하면 여전히 불친절 하다. 인천에서 마닐라로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에서 보라카이 공항으로 환승, 보라카이 공항에서 항구로 이동, 배로 갈아타고 섬에 입성, 항구에서 호텔, 막상 도착하면 별거 아닌 일정이나 여러번의 교통수단 환승은 다른 여행지에 비하면 복잡한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런 복잡함이 보라카이의 빅플랜이 아닐까 생각했다. 힘든 여정을 뚫고 도착한 보라카이의 화이트 비치는 지상낙원이라는 상투적인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저 바라 보기만 했다.
도착한 시간이 아침 7시라 호텔 체크인을 할 수 없었고, 장시간 여정으로 피곤은 극에 달했다. 호텔에 가방을 맡기고 옷을 갈아 입고 호텔 침대 대신 선배드에 누웠다. 적당히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과 맑은 하늘, 평화로운 분위기에, 낮잠은 아니지만 잠을 청하기 적당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고 일어났지만 변한 것도 없고 시끄러운 소음도 없는 파도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 소리뿐이었다. 내가 여행와서 밝은 시간에 잠을 자본적이 있는 지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여행, 루틴한 일상을 벗어나 삶의 활력소를 찾기 위해 하는 것인데,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누구가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누구가에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여행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여행철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같은 사람이 늘 같은 여행을 할 필요도 없고, 휴양을 위한 여행도, 새로운 경험을 위한 여행도 필요한 그 때 그저 하면 되는게 아닌가.
아침에 일어나 조식당을 돌며 아침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한숨 잔다. 수영장에 가고, 선배드에서 낮잠을 자고, D-mall에서 점심을 먹고 바다물에 몸을 담그고, 저녁이 되면 세일링 보트를 타고 선셋을 봤다. 그리고 비치에 펼쳐진 레스토랑에서 좀 근사한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잔하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
하루에 하는 일은 일어나 먹고 자고 해뜨고 지는 것을 보며 하루를 보내는 일이다. '놀고 먹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실천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여행지에서나 혹은 여행이 아니어도, 일상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일상이나 여행지에서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쉬는 것외에 다른 선택이 많기 때문이다.만약 내가 하루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면 정해진 여행일정에서 하나를 못보게 된다. 그것이 불안과 후회로 남아 마음 편히 쉴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휴식도 여행의 일부 아닌가.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것, 그리고 아무것도 할게 없는점. 그게 제일 좋았다. 좀 더 유명한 휴양지로 하와이나 발리, 괌, 사이판 같은 곳도 있다. 휴양시설이나 교통편으로 치자면 보라카이 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다. 그러나 내가 보라카이가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할게 없어서 였다. 이 보다 섬이 좀 더 컸고, 볼 거리가 많았다면, 이것 저것 보며 구경하고 쇼핑을 하고 일정을 짜고 늘 하던 패턴의 여행이 됐을 것이다. 보라카이는 배로 한바퀴 돌면 모든 섬을 다 볼 수 있고, 1시간이면 디몰은 다 돌며, 화이트 비치는 끝과 끝이 한눈에 보였다. 더 이상 할게 없음을 알고 나니 맘편이 쉴 수 있었다. 좀 이상할 수 있지만, 그게 보라카이에서 가장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