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자유로워야 하는 도시
홍콩은 막연한 동경의 도시였다. 홍콩 르와르 세대로 왕가위와 주성치의, 장국영과 주윤발, 장만옥과 임청하의 영화를 보며 자랐다. 내가 아는 홍콩은 늘 화려했으며 자유로웠고 위태로워 보였다. 젊은 이들의 낭만과 고뇌도 함께 했던 곳으로 보였다. 나에게 홍콩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네버랜드 같은 곳이었다. 홍콩 여행을 계획하던 그때가 여행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신난 기억이다. 짧은 3박 4일이었지만 단 하루도, 1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엑셀에 1시간 단위로 스케줄을 적어 넣었다. 물론 무모한 스케줄로 여행의 피로만 누적되었지만, 고생도 추억이 되는 게 여행 아닌가. 결론적으로 내가 여행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곳이 홍콩이었다.
홍콩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아시아 최대 국제도시이며 마천루와 야경이다. 좁은 면적에 빽빽이 들어있는 고층 빌딩은 미래도시 같은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거기에 전 세계 금융자본과 그와 함께 들어오 외국인들로 가득하다. 전 세계 명품의 소비와 유통이 가장 활발하며 호텔과 카지노 유흥 산업도 함께 발달한 도시다. 홍콩의 거리에는 우리나라 올리브영 매장만큼 롤렉스와 티파니 매장을 봤고, 도시의 모든 건물에는 쇼핑센터가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홍콩은 미래도시에 가장 가까운 풍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홍콩의 모습은 중경삼림의 미들레벨 에스컬레이터, 화양연화 양조위와 장만옥, 아비정전의 장국영의 만보 춤이고, 영웅본색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내가 아는 홍콩은 영화의 장면이고, 나의 기억도 영화의 배경이지만 왠지 친숙한 느낌의 도시가 홍콩이다. 그런 과거의 향수를 찾는 여행을 했다.
빙셧은 1950~60년대 홍콩의 카페를 말한다. 예전에 빙셧으로 운영했던 곳을 스타벅스 컨셉 스토어로 현재 운영되고 있다. 주변에는 과거 사용되었던 가스등과 계단 일부 장식들이 보존되어 있다. 어렸을 때 내가 즐기던 곳도 아니고 나의 추억 속에 장소도 아니다. 다만 어린 시절 홍콩영화에서 우연히 봤을 기억으로 찾은 것이다. 미래도시에서 과거를 찾는 여행(?)
영화 중경삼림에서 페이가 몰래 663(양조위) 집을 지나는 장면으로 알려진 곳이다. 미들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약 800m 세계에서 가장 길 에스컬레이터로 기록되어 있다. 언덕으로 수많은 집들이 연결되어 있는 홍콩은 집과 집 사이가 50센티 정도가 고작이다. 에스컬레이터는 건물의 창문을 스치고 지나간다. 중경삼림 처럼 창문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지나는 사람을 마주칠 수 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주변은 소호로 홍콩에서도 가장 힙한 곳이기도 하다. 홍콩의 랜드마크로 유명하지만 <미들레벨 에스컬레이터> 라고 큰 간판을 걸어두진 않았다.
처음 내가 이곳을 갔을 땐 수많은 에스컬레이터 중 하나인지 이곳이 진짜 영화에서 보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인지 의문이 들었다. 무작정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랐다. 홍콩의 풍경도 보고 마주오는 사람도 봤으며, 점점 높이 올라가고 있지만, 목적지는 없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시 내려와야 하는 걱정과 에스컬레이터 끝 지점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마치 무지개 끝에 낙원이 있을 거 같은 기대(?). 한 여름 더위를 뚫고 에스컬레이터의 끝 지점에 도착했지만, 그저 평범한 홍콩의 건물만 있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올라가 보실 수 있게, 사진은 (있으나) 생략한다.
홍콩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그냥 더운 동남아에 온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한 홍콩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심으로 들어와 트램을 보는 순간. '여기가 홍콩이구나' 느낌이 바로 들었다. 개인적으로 홍콩의 상징은 빅토리아 피크도 마천루의 야경도 아니고, 1950~60년대부터 사용했을 거 같은 구형 트램이다. 홍콩의 모습을 레트로 한 게 만들어 주고 신도시와 구도시를 연결하는 문화적 연결점 같았다.
홍콩은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로 손꼽힌다. 서울보다 작은 면적에 약 6,000만이 거주한다. 서울보다 작은 도시에 한반도 인구가 살고 있으니 건물은 높이 올라가고 도로는 좁아진다. 그래서 홍콩에서 자가용을 소유하는 건 특권층만 가능한 일이다. 어마어마한 세금과 주차장 이용요금 등 서민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트램과 같은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다. 홍콩에서 꼭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트램 타기였다. 목적지 없이 아무 트램을 잡아 타 왕복 했다. 트램 코스가 워낙 단조로워, 탔던 곳에서 내려도 되고 다시 돌아와도 특별히 길을 잃지 않았다. 한동안 트램 정류장에서 트램만 왔다 갔다 하고 정차하는 모습만 바라봤다. 트램을 보니,. "여기가 홍콩이구나"
홍콩 하면 또 떠오르는 건 '밤거리'. 밤 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늦은 시간까지 수많은 가게가 열려 있고 환히 불을 밝히고 있다. 명품거리로 유명한 켄톤 로드는 물론 짝퉁으로 유명한 몽콕 야시장까지 불이 꺼져 있는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세상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도시는 없지만, 홍콩은 비교적 치안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밤에 돌아다닌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홍콩의 여름은 습한 더위 때문에 주로 밤에 활동한다. 여행자에게 밤 시간은 보너스로 주어지는 시간이다.
거대하고 화려한 홍콩의 모습이 있지만, 홍콩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다. 거리를 걷고 골목을 다니면, 홍콩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미래도시 속을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도시를 채우고 있는 건 거대한 건물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이후로 홍콩은 3번은 더 다녀왔다. 출장도 있고 여행도 있었는데, 홍콩은 나에게 애증의 도시 같다. 살인적인 도심의 더위와 복잡한 구조는 날 질리게 하다가, 선선한 밤이 되고 홍콩의 야경이 주는 편안함과 소호 거리의 맥주 한잔이 이 도시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홍콩을 유독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한 추억이 있는 곳이고, 이 당시 홍콩 여행을 기점으로 나의 여행의 방식도 정말 달라졌다. 여러 모로 내 여행의 기록에서 항상 우선순위에 있는 곳이 홍콩이다.